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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6 22:17 수정 : 2020.01.07 16:39

‘한국연극’ 편집주간·기자로 인연
20여년 함께 연극 보는 짝꿍으로

할머니 별세 뒤 혈혈단신 팔십평생
60대 중반 심장판막 이상 알고 수술

임종 때까지 지인 선물 답례 ‘당부’
“사람 도리 가르쳐주신 인생 선배”

[가신이의 발자취] ‘연극평론 개척’ 구히서 선생님 영전에

2019년 12월31일 별세한 연극평론가 고 구히서 선생. 사진 고 정형우(1971~2009) 사진작가
지난해 마지막 날, 우리 곁을 떠나신 고 구히서(본명 구희서) 선생님은 내겐 연극과 함께 시작된 인연이다. 월간 <한국연극>(한국연극협회 발행)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을 때 구 선생님은 편집주간을 맡고 계셨다. 선생님의 팔십 평생 가운데 20년, 짧은 인연이지만, 내게 선생님은 사회에서 운명처럼 만난 존경스러운 어른이기 이전에, 카페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던 동네 언니였고, 손잡고 다니던 짝꿍이었고, 언제든 대문 밀치고 들어가 밥 달라고 칭얼댈 수 있던 할머니였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셨던 선생님은 심장판막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셨다. 60대 중반에야 뒤늦게 심장판막 수술을 하셨는데, 위험한 수술이어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다. 선생님을 뵌 지 3~4년이 지났을 때인데, 그때 처음 선생님의 손을 잡아보았다. “사람과 나누는 마땅한 접촉 분량이 적은 사람이라서 어색하고 힘든 사람”이라는 선생님의 헛헛한 자책도 그때 처음 들었다. 선생님은 중학교 때까지 길러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딱히 가족도, 자주 오가는 친적도 없으셨다.

매달 내가 가볼만한 공연 일정을 짜서 보내드리면 선생님은 무조건 그 일정에 맞춰 극장에 나타나셨다. 덕분에 선생님과 나는 연극 함께 보는 짝꿍이었다. 선생님은 연극을 더 열심히 보고 싶어서 언론사 퇴직 이후 반포에 있던 집도 대학로 가까운 명륜동으로 옮기셨다.

술을 못 드셔도 술자리에 앉아 계실 때면 소주잔에 열심히 물을 담아 건배에 응하셨고, 생일이면 전 날부터 설레어 하시다가 아침 일찍부터 단장하고 사람들의 축하 인사를 기꺼이 감사하고 기쁘게 받으셨다. 식사 자리에서는 언제나 먼저 일어나 계산을 끝내놓으셨고, 선물을 받으시면 어떻게든 보답을 하시곤 했다.

돌아가시던 날, 4시간 전쯤 내게 전화를 하셔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것도 그런 말씀이었다. “누군가 작은 단지를 하나 보냈는데, 그 분 성함이 이러저러하니 찾아봐라. 번호를 알아내면 대신 인사를 꼭 전해드려라.” 발음과 말씀이 분명치 않아 대략 되물었던 내용이었지만 대답은 또렷하셨다.

내가 가까이에서 뵌 선생님은 많은 것을 어려워하시던 분이셨다. 간단한 관공서 일도 두려워 하셨고, 싸울 일이 생기면 먼저 피하셨고, 낯선 사람과 나누는 대화나 사람 많은 곳도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가끔 부득이하게 파티나 시상식에 참석하셨을 때는 전신에 힘을 주고 계시는 것이 내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그렇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무리 속에 머물면서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가치있고 중요한 일인지를 내게 가르쳐주려고 애쓰셨다.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마땅하고 옳은 태도라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고 구히서 선생. 사진 고 정형우 사진작가
선뜻 나서는 게 그렇게나 어려웠던 분인데도 선생님은 연극과 관련해 부족하거나 곤궁해하는 일을 보면 가만히 손을 들어 자처하셨다. 기차로 춘천을 오가면서 심사비도 없는 인형극 대본심사를 10년이나 혼자 도맡았던 일이나 ‘전국어린이연극경연대회’ 공연심사에 10여년간 참여했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다. 별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일이지만 연극이니까 했고, 할 사람이 없어도 해야 되는 일이니까 하기도 했던 일들. 선생님이 크게 소리내지 않고 각별히 정성을 쏟은 일들은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다.

20년간 해마다 연말에 ‘히서연극상’ 시상식이 끝나면, 선생님은 시상 전보다 시상 뒤의 그들을 더 많이 걱정하셨다. 연극상이 자칫 그들의 성장을 멈추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하셨고, 시상 후에는 그들의 다음 무대에 각별히 관심을 갖고 정말 열심히 극장을 찾아다니셨다. 그것은 연극인들을 향한 무언의 응원이었고, 연극과 인생에 대한 온전한 책임이었다.

선생님이 연극계에서 지난 50여 년간 이뤄낸 성과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깊고 울림이 크다. 저널리스트 평론가로서 연극을 대하는 자세와 바른 태도를 보여주었고, 인생 선배로서 매사 정성스럽게 대하는 성실함으로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리거나 놓쳐버린 것들을 일깨워주셨다.

먼저 떠난 사람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함께 살아있는 것이라고, 선생님은 내게 자주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선생님은 많은 연극인들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 영원히 그렇게 함께 살아계실 것이다.

선연 김수미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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