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1 21:15
수정 : 2019.03.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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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별세한 문동환 목사의 연세대세브란스병원 빈소를 문재인 대통령, 이낙연 국무총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등의 화환이 지키고 있다. 사진 한신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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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 이의 발자취] ‘한국 민중신학의 선배’ 문동환 박사님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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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별세한 문동환 목사의 연세대세브란스병원 빈소를 문재인 대통령, 이낙연 국무총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등의 화환이 지키고 있다. 사진 한신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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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한국 민중신학의 선배’ 문동환 박사님,
오늘 11일 아침,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과 특수부대를 동원해 무차별 학살하고 탄압한 전두환씨가 광주지방법원의 재판을 받으러 연희동 집을 떠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았습니다. 만감으로 착잡합니다. 1989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청문회에 전두환씨를 소환해 역사적 심판을 내린 평화민주당 수석 부총재, 문 박사님이 간절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끝내 광주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고 ‘‘5·18’ 주역과 증인들을 거짓말장이로, 악마로 매도한 전씨가 광주의 법정에 서는 날, 문 박사님은 눈을 감고 계십니다.
한신대의 대표 신학자, ‘문익환·문동환 브러더스’를 안타깝게 떠올립니다. 지난 2월 28일, 하노이의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되었습니다. 우리는 ‘5·18’의 좌절 이후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평화통일운동으로 전환했습니다.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이른바 ‘88선언’을 채택해 발표했습니다. 한국의 진보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회자, 평신도가 뜻을 모아, 남북 분단의 갈등과 민족상잔의 역사를 넘어 평화 공존과 민중해방의 새 역사를 추동하였습니다. ‘문 브러더스’는 한국교회의 평화통일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형님, 문익환 목사님이 1989년 휴전선 넘어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 ‘7·4 공동성명’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의 ‘88선언’ 지지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감옥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오늘, 평화의 봄바람은 ‘꽃샘 바람’이 되어, 평화 공존과 민족 화해의 꽃이 만발하기를 다시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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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재야와 정치권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시절의 문익환(오른쪽) 민통련 의장과 문동환(왼쪽) 평민당 부총재. 필자 서광선 목사는 1960~70년대 한신대를 대표하던 형제 신학자 ‘문 브러더스’와 각별한 교유를 나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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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박사님, <성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자 모세가 에집트의 노예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기 직전 눈을 감아야 했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젊은이들의 몫이다. 청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는 야훼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고향 용정까지 닿는 동해안 철도가 다시 남북으로 이어질 희망에 부풀어 있는 지금, ‘실향민’ 떠돌이 목사님은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우락부락, 용맹무쌍, 국회 의사당이 떠나가라고 고함 지르던 ‘투사 문 박사님’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한국 군부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역설하실 때 그 모습은 정말 열정적인 정치운동가였습니다. 일찌기 1970년대 군부독재에 항거한 한신대 학생들이 강의실을 뛰쳐나와 거리를 행진할 때, ‘교수 문 박사님’은 문교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학생들 편에 서서 격려하고 함께 참여했습니다. 다른 교수들과 함께 삭발을 하고 저항했습니다.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종교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선교신학’을 배운대로 가르치고, 배운대로 행동하고 실천했습닙니다. 독일의 나치 저항 신학자 본회퍼의 정치신학을 종교교육으로 해석하고 실천했고, 몰트만의 정치신학을 한국 민중교육으로 실천했습니다. 1970년대 초에는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노동자도 사람이다’는 외침에 충격을 받아, 남미의 해방신학을 소개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남미 해방신학자 폴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을 한국의 신학대학과 교회에 널리 심었습니다.
문 박사님의 한신대 제자들은 독일의 신학이나 미국의 교육신학에만 몰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당면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예수의 길, 예수의 가르침을 몸으로 배우고 표현하는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한국 민중의 정치문화를 찾아, 판소리를 배우고,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현장에서 가면극을 공연했습니다.
박정희 유신군부독재 시대 저항적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선 문 박사님의 ‘떠돌이 인생’에서 감옥살이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1979년 와이에이치(YH) 사건 때 여성 노동자들 편에 서서 투쟁하며 5개월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에 앞서 1976년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여 22개월 동안 형 문 목사님과 김대중 선생, 안병무·이우정 교수 동지들과 함께 정치범의 떠돌이 생활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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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8일 서울 사직동 수도교회에서 열린 문동환(왼쪽) 목사가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 출간기념회에서 부인 문혜림(페이 문·오른쪽)과 함께 연단에 올라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삼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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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문익환 목사의 자서전 출간 기념회에서 필자 서광선 목사가 축하 설교를 하고 있다. 사진 베리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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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10년 전인 2009년 9월, 문 박사님의 미수(88살 생신) 기념 자서전 <떠돌이 목자의 노래> 출판기념회 때 설교를 맡아 드렸던 말씀으로 이 추모의 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옛날 바울 선생님은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본향, 우리 모두의 본적지는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떠돌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정을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마음을 비우고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의 본고향, 하늘나라를 향해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목사님의 부재는 우리의 현존입니다.
서광선/이화여대 명예교수·민중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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