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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6 18:23 수정 : 2019.03.06 19:19

풀베다 낫에 올라타던 ‘별난 아이’
무당 외할머니에게 17살때 대물림
한국전쟁때 수차례 죽을 고비 넘겨
“남은 삶 신령님 뜻따라 세상 위해”
70년 만신 인생 ‘굿을 전통문화로’

[가신이의 발자취]‘마지막 큰무당’ 김금화 선생을 그리며

2017년 9월 강화도 금화당에서 마지막 만수대탁굿을 펼칠 때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만신 김금화(오른쪽) 선생과 조성제(왼쪽) 소장.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이 시대의 마지막 큰 만신 김금화 선생님, 평생토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덕과 복을 베풀어주시고 빈 손으로 칠성님 품으로 돌아가셨네요.

아들을 바라는 집의 둘째딸로 태어나 이름마저 ‘넘새’로 불리며 구박덩어리로 자라다 13살에야 ‘금화’ 이름을 얻으셨죠. 어릴 적부터 ‘아는 소리’를 하고, 풀을 베다가도 아이들에게 낫을 잡게 하고 그 시퍼런 날 위에 올라 춤을 추었다지요. 심상치 않는 행동과 무병에 시달리자 정작 무당인 외할머니가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지요. 신의 형벌로 여기며, 사람 대접 못받고 살아왔기에 외손녀의 대물림이 누구보다 싫었던 그 마음을 무당이 된 뒤에야 아셨다고 했어요. 그러나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외할머니에 의해 신의 딸로 거듭난 때가 17살, 황해도 굿의 전설로 알려진 방수덕 만신을 만난 뒤 선생님의 총명함이 더해져 굿의 기량도 일취월장했지요.

1950년 19살 때 선생님은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드리우고 천둥번개가 치면서 많은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고 6·25 전쟁을 예견했어요. 인민군은 무당을 반동분자로 몰아 처형했기에 숨어지내다 결국 붙잡혔지만, 다행히 마을 원두막에서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요. 그러다 9·28 수복이 되자 이번에는 국군들에게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할 뻔 했으나 어머니의 애절한 하소연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요. 겨우 배를 구해 나선 피난길에 태풍을 만났으나 기적처럼 덕적도에 정박해 살아남을 수 있었구요.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선생님은 남은 인생 신령님의 뜻에 따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했지요. 하지만 새마을운동으로 미신타파를 외치던 시절 굿을 하다가도 경찰을 피해 창문으로 도망 나가야 했고, 때로는 붙잡혀 한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어요. 죄인 취급받는 무당의 삶이 한스러워 원망도 많이 했다지요.

그러나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굿에 대한 편견을 바꾸기 위해, 굿은 우리 민족의 심성이 담긴 전통문화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민중들과 함께 하기로, 홀로 외로운 길에 뛰어들었어요. 1980년대초부터 틈만 나면 대학로에 작은 젯상을 차려 놓고 굿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다행히도 경찰이 잡아가지도 않았고, 멸시와 외면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어 희망을 보았다고 했어요. 그 시절 대학생들과 함께 어우러져 춤추며 웃고 있는 모습이 참 고왔지요. 군사독재시절 선생님의 굿판에서 민중들이 짓눌린 감정을 표출하고 절규할 때,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용기와 희망을 주었지요.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공연단으로 미국에 갔을 때, 우리나라 영사가 ‘나라망신 시킨다’며 굿을 못하게 했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했어요. 그럼에도 관객들이 공연장을 나서려는 순간, 사회자 소개도 없이 무작정 무대에 오른 선생님은 간절한 몸짓과 소리로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어요. 한국 굿의 신비함과 절묘한 장단과 소리에 반한 미국인은 ‘원더풀’을 연발하며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고 즐거워했고 선생님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요. 계속 공연을 해달라는 영사의 간곡한 부탁에, 26일 동안 미국 곳곳을 돌며 신명한 굿판을 펼치고 돌아왔을 때가 선생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된 순간이라고 늘 말씀했어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보다 더 감격스러웠고 보람을 느꼈다지요.

신의 형벌을 축복으로 바꾼 선생님은 2007년 황해도굿의 전통을 이어갈 후진을 키우고자 전 재산을 들여 강화도에 ‘금화당’을 지었지요. 2017년 9월 그곳에서 사흘간 만수대탁굿을 펼칠 때 제게 귓속말로 이런저런 당부를 하기도 했지요. 97살 때 또 한번 만수대탁굿을 하기를 기원하며 웃던 그 소리, 그 미소 생생한데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의 굿을 볼 수 없다니…, 벌써 그립습니다. 선생님의 기량과 문서 그리고 재담과 해학적인 몸짓까지 누가 있어 그 뒤를 이을 것이며 한국 무속을 대변할 것인지 심히 걱정이 앞섭니다.

굿이 한국 전통문화의 뿌리라는 것을 몸으로 입증해보이며, 굿의 사회적 순기능을 충실하게 실천해보인 선생님은 무속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모두에게 존경받기에 충분한 큰어른이었습니다. 만신 70년 영욕의 세월에 쌓인 한과 원망 그리고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으시고 칠성님 품에서 편히 쉬시소.

조성제/무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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