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0.24 19:48 수정 : 2018.10.24 19:53

1970년대 계훈제 선생과 도피다닐 때
남편 대신 국수값 내주며 늘 웃기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세상 울려주시길”

[가신이의 발자취] 아, 계훈제 선생님의 부인 김진주님을 떠나보내며

재야운동가 고 계훈제 선생의 부인 김진주님이 24일 별세했다. 두 사람은 동거 12년만인 1978년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갖다나(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 데다 독감주사를 맞은 때문이었을까. 지난 밤새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든 이른 아침, “아버지, 계훈제 선생님의 아주머니께서 돌아가셨대요.” “뭐라고, 벌떡 일어나며 아, 또다시 나의 다짐을 저버렸구나”하고 남의 일생을 슬퍼하기보다는 덜떨어진 나를 물고 늘어지고 말았다.

지난 1970년대였을 거다. 쫓기는 몸으로 몰래 계훈제 선생님을 만나 돈 몇 푼을 얻으려고 했는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선 어느 낯모를 아주머니한테서 얼마를 얻어주신다. 나는 얼핏 돌아서다가 “아주머니, 내 발목에 쇠사슬을 끊어 팡개치면 그때 곱으로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따금 만나게 되면 빙그레 웃을 뿐 여태 그 돈을 갚지는 못해왔다.

계 선생님은 남모를 꿍셈이 있던 분이셨다. 첫째, 허구한 날 만나도 주머니에 돈이 몇 푼 있다 없다는 말은 안하시고 둘째, 낯참(점심) 때가 지나고 나서도 끼니를 메꾸셨다 못 메꾸셨다는 말은 안하시고 셋째, 다리가 아프니 집에라도 가서 좀 쉬자는 말도 안하시고 넷째, 시민증을 안 갖고 다니시는데 그 까닭을 언젠가는 이렇게 털어놓으셨다. 나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지, 갈라선 땅의 시민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러면 불편하실 터인데요”라고 물으면 불편하다고 느끼는 그게 바로 분단의 수렁, 반통일이라고 울부짖곤 하셨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 “아니 헝님, 거 아주머니한테 이따금 쌀말이도 보태주시는 겁니까.” 이때 자못 놀란 눈빛으로 “이봐, 백기완이는 집안일을 좀 거들어주면서 그따위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던 계 선생님의 부인 김진주 여사님! 그분이야말로 이 분단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며 살다간 이 땅의 빼어난(전형적) 여인은 아니었을까.

나도 계 선생님도 꽁꽁 숨어 지낼 적이다. 좀 구석진 데라도 가서 국수 한 그릇씩을 하시더니 돌아오시질 않는다. 이에 나는 먼저 국수 세 그릇을 낼름 해치웠는데도 계 선생님은 아니 나타나시고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국수값을 물고는 말도 없이 가시다가 되돌아오셔서 주인한테 따지고 있다. 아니 사람은 하나인데 어째서 세 그릇이냐고, 그릇을 속이느냐고 따지는 게 아닌가. 이때 소름이 끼친 내가 나서 제가 세 그릇을 먹었다고 하니 김진주 여사님께서 그제서야 웃으면서 돈을 물던 생각이 난다.

아무리 분단의 현실은 참짜 현실이 아니라고 해도 돈은 돈대로 갚아야 하는가보구나, 하고 속으로 웃음 짓던 그때가 벌써 서른 해가 지났구나. 아주머니, 그때나 이제나 낯짝을 못 들겠사오니 어디를 가시던지 그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울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맨왼쪽) 선생이 24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신 고 계훈제 선생의 부인 김진주님의 빈소에 문상을 하고 있다. 사진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고 계훈제 선생 부인인 김진주(화가)씨가 24일 오전 5시 별세했다. 향년 87. 유족으로는 아들 계여곤 고신대복음병원 응급의학과 의사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 26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공원묘지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