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7.30 20:13
수정 : 2018.07.3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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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서울광장에 고 박정기 선생 민주시민장 서울분향소가 만련됐다. 31일 오전 부산시민장례식장에서 발인한 고인의 운구는 오후 2시30분 서울광장 노제를 거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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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고 박정기 어르신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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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서울광장에 고 박정기 선생 민주시민장 서울분향소가 만련됐다. 31일 오전 부산시민장례식장에서 발인한 고인의 운구는 오후 2시30분 서울광장 노제를 거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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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잔잔한 미소로 편하게 맞아 주시던 박정기 어르신의 모습,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1987년 박종철의 죽음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맞습니다.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회 민주화의 초석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사독재정권의 야수와 같은 고문으로 자식을 민주의 제단에 바치면서 먼저 보내야 했던 어르신의 그 슬픔과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럼에도 어르신은 그 슬픔과 고통을 끝내 이겨내고 승화시켜 지난 31년간 자식의 몫까지 대신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먼저 간 막내 종철이의 든든한 동지가 되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막내를 고문으로 숨지게 한 것도 모자라 그 의로운 죽음을 축소·은폐·조작했을 때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지난 31년간 단호히 맞서 싸워왔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르신은 또 다른 종철이의 아버지, 어머니들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만드셨고 이끌어 오셨습니다. 어르신은 투쟁의 현장마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그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농성 현장에도, 처절하고 억울한 죽음의 현장에도 늘 어르신이 함께 하셨습니다. 아들 종철이가 살아있었다면 마땅히 있었을 법한 곳엔 늘 당신께서 계셨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어르신이 보여주신 그 용기와 결단, 과감한 실천은 우리 모두에게는 큰 감동이었고, 힘이었고, 귀감이었습니다.
박정기 어르신! 어르신께서 살아내신 지난 90년의 세월은 말 그대로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였습니다. 스스로의 몸도 온전히 건사하기 쉽지 않은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어르신 역시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오직 장남으로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견뎌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르신이 87년 그 충격적인 사건 이후 종철이의 몫까지 감당하며 사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 과정에서 막내아들과 늘 대화를 나누며 사셨을테니 그래도 힘든 줄 모르셨을까요?
어르신은 지금도 아직 못다 한 일이 있다고, ‘막내 철이’와 한 약속을 아직 다 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쉬워하실 필요도 서운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해내셨습니다. 31년 만에 검찰총장의 사과도 받아냈지 않습니까. 422일간의 농성을 통해 의문사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 명예회복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워내지 않으셨습니까. 종철이를 잊지 않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종철이와 같은 꿈을 꾸면서 이 땅에서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용기와 믿음을 주셨지 않습니까.
어르신, 이제 남아 있는 우리가 하겠습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검찰이 한 잘못이 무엇인지 명명백백히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1차 과거사위원회의 활동 성과와 한계를 점검하고 2차 과거사위원회가 제대로 출범해서 과거사 청산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저희가 힘쓰겠습니다. 남아 있는 저희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돌아가시고 헌신한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민주유공자법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촛불혁명의 흐름을 계속 살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어나가겠습니다.
박정기 어르신! 이제 막내아들 곁에서 그동안 못다 나눈 이야기 나누면서 편히 쉬십시오!
김학규/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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