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05 21:10
수정 : 2018.02.05 21:14
【가신이의 발자취】 황병기 선생님의 영전에 올리는 글
1988년부터 가르침 받은 30년 인연
“한국 전통·서양음악 접목해 확장”
‘세계인에게 남긴 말씀’ 기억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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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킬릭(맨오른쪽) 교수는 한국인 부인(맨왼쪽)과 딸(왼쪽 둘째) 등 가족과 함께 지난 ?2016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박물관 전시실 음악회’에서 열린 황병기(가운데) 교수와 수제자 지애리(왼쪽)씨의 가야금 연주회를 관람했다. 사진 킬릭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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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황병기 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황 교수님은 한국 전통음악가였음에도, 그의 삶과 업적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저명한 작곡가 루 해리슨과 앨런 호바니스 등 많은 외국인 제자들이 있었다. 필자는 1988년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2013년 <황병기―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 작곡가>(영국 애시게이트 출판사·한국어판 제목 ‘황병기 연구:한국 전통음악의 지평을 넓히다’, 2015)를 펴내기도 했다.
황 교수님은 1964년 첫 국외 공연을 시작으로 아시아와 유럽, 북미 등에서 100여차례 공연했다. 이듬해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가 첫 솔로 음반을 냈고, 마지막 음반은 2007년 영국의 세계음악 레이블인 에이아르시(ARC)에 등재됐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뉴그로브 음악사전> 등 세계적인 음악 관련 사전 여러 권에 등재될 정도로 높다. 2010년 한국인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대상을 받았다. 인도 전통악기 시타르의 명인 라비 샹카르도 받았던 권위 있는 상으로, 아시아 문화를 보존하고 창조하는 데 업적이 큰 개인이나 단체한테 준다. 수상 이유는 이랬다. “황병기는 한국 가야금 전통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췄으며 세계가 공감하는 음악을 작곡해왔다.” 이처럼 그의 업적은 단지 한국 가야금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세계인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조화시켰다는 데에 있다. 그의 연주 실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악과 산조 양식 모두를 섭렵했고 한국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단지 아방가르드적인 현대음악가 이상일 수 있었다.
한국의 많은 음악가들이 더러 국악기로 서양음악의 형식과 화음을 연주하는 식으로 곡을 만들었지만, 황 교수는 한국의 전통 위에 외국 음악의 구조와 기술을 접목시키는 대신 전통을 자체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20세기 서양 작곡가들의 새로운 시도들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그런 기술을 흉내 내기보다는 한국 전통 미학과 어울리는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그 둘을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그랬기에 그의 작업이 세계인들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황병기의 업적은 아시아 문화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는 데도 특별한 기여를 한 것이다. 과거 가야금 산조는, 숙련된 연주자들은 자신이 배웠던 방식만 고수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변화·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의 연주와 완벽하게 똑같은 연주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무형문화재 보호제도의 도입 이후, 몇몇 유명한 산조가 악보 위에 기록되면서 정형화됐다. 연주자들은 그것을 암기하고 재연하는 데에 치중하게 되고 더 이상 독창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려 들지 않았다. 황병기는 달랐다. 그는 무형문화재 제도 바깥에 머물며 자신만의 산조를 발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출판하고 연주하고 음반에 담았다. 그는 결국 더욱 전통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산조 음악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중국계인 미국 작곡가 추웬청(저우원중)은 “아시아의 작곡가는, 스스로 살아 있는 문화로서 전통을 이어가는 매개체가 돼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황 교수님이 가장 적합한 예가 아닐까 싶다. 그는 전통에 탄탄히 발 딛고 서서 끊임없이 창조와 혁신을 위해 나아간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황 교수님은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면 그것은 골동품이 되고 만다. 옛것으로 오늘날을 사는 우리와 소통할 때 비로소 그것은 전통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지구촌 사람들 모두에게 남긴 말씀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앤드루 킬릭/영국 셰필드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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