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9.17 23:01
수정 : 2017.09.1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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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4일 도쿄 오츠야에서 하시모토 아키라 선생의 추도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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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친한파 언론인’ 하시모코 아키라 선생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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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4일 도쿄 오츠야에서 하시모토 아키라 선생의 추도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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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은 가지만 우리는 그 날이 오는 줄을 모르며 산다." 지난 달 갑자기 가신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1933~2017) 선생의 도쿄 추도식에서 사회자가 한 말이다. 생전의 교류와 넓은 인맥을 보여주듯 일본의 각계각층이 모였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2013년, 후쿠시마 대지진으로 고통받은 일본인들을 생각하며 펴낸 시집 <그대의 마음 있어 꽃은 피고> 등 2권의 내 책 출판기념회 때였다.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행사 뒤 긴 줄에 서서 그의 차례가 오자 감격했다는 말과 함께 악수를 했으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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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왕족·귀족학교인 학습원 고등시절인 1950년무렵 소풍 때 황태자 아키히토(맨왼쪽)와 함께 찍은 같은 반 동기들(고가쿠유) 사진. 오른쪽 둘째가 하시모토 아키라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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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
교도통신>의 저명한 저널리스트로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장래에 일본 천황이 될 아키히토(明人) 황태자와 학습원(學習院)의 동기로 더 유명하다. 그도 선친은 검찰총장이요 사촌형이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였으며 동생 다이지로가 시코쿠의 도지사인 정치명문이나, 왕족과 귀족을 받은 학습원이라 해도 나라의 천황이 될 황태자를 맞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같은 반 30명 중에 하시모토가 뽑혔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동기를 ‘고가쿠유’(御學友)라는 특별 존칭으로 부른다. 장례식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 등 유럽 국가원수와 함께 한 사진들 액자 앞에 그의 저서를 늘어 놓았는데 <미치코 황후의 연문> <알려지지 않은 천황 아키히토> 등 일본 천황에 대한 책만도 4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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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아키타현 아키타시에서 열린 음악회의 무대에서 나란히 인사를 하고 있는 이승신(왼쪽) 단가시인과 하시모토 아키라 선생(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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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서울에서 세번, 도쿄에서 네번, 교토에서 내가 공부할 때도 찾아와 만났었다. 특히 음악을 좋아해 매해 바티칸에서 합창을 해온 그가 일본 작곡가에게 나의 시를 주며 작곡을 의뢰해주었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한 음악회가 4번 열렸는데, 2016년 9월 아키타시 무대에서는 나와 함께 스피치를 하기도 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한국을 공부하는 모임인 도쿄의 일한담화실(日韓談話室)에 서울에서 강연하러 매달 오는 91살 고령의 최서면 선생이 갑자기 가시게 되면 자신에게 먼저 알려달라며, 나에게 깊은 걱정을 했는데 그런 자신이 먼저 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것도, 지난 5월 27일, 그가 한일관계의 권위자인 최서면 선생을 인터뷰해 쓴 <한국연구의 귀재 최서면>의 도쿄 출판기념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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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7일 도쿄에서 열린 <한국연구의 귀재 최서면> 출간기념회 때 초청강연하는 최서면(왼쪽) 선생을 바라보고 있는 저자 하시모토 아키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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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74년 ‘8·15 광복절 육영수 피살 사건' 취재차 서울에 온 이후 ‘한국 사랑' 을 품어 왔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일왕의 한국 방문을 실현하고자 애써 온 인물이다. 그것이 ‘한일 관계의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가장 좋은 계기일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환히 웃고 있는 영정 사진과 관에 누운 모습을 보며, 한반도와 동북아에 위기가 몰려 온 지금, 양국의 돈독한 관계를 이루고자 했던 ‘큰 별’ 하나 잃음이 애석하다.
죽음이 슬픈 것은 이 지상에서 다시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한일관계를 위해 헌신해 온 그 열정이 부디 식지 않고 한일 양국에 잘 이어져 가기를 소망해 본다.
어머니 손호연 시인의 단가 한 줄을 영전에 바친다.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 아무도 모르면서 장례 줄에 서 있네’
글·사진 이승신/단가시인·손호연단가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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