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7.31 22:05
수정 : 2017.08.02 22:52
【가신이의 발자취】 ‘84년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 선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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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엘에이(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씨가 지난달 27일 치악산 하산길에 별세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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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집 식탁 벽에는 그가 보내준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다. 삼성생명 제주도 소장 시절 그가 직접 찍은 해변 바위 사진 한귀퉁이에 1984년 엘에이(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시상식 사진을 작게 넣고, 다른 쪽 귀퉁이엔 자신의 사인을 새겼다.
‘1984년 엘에이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김원기씨가 지난 27일 치악산 하산길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55.’ 아직도 믿기지 않는 소식이다. 아침마다 그 사진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
지난 77년 함평농고 레슬링 창단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다. 농고 화원이나 실습장에서 일을 해주며 학비를 면제받던 실무장학생 김원기가 레슬링을 해보고 싶다며 찾아왔다. 힘보다는 유연성이 뛰어난 그는 타고난 레슬링 선수라기보다는 노력형이다. 가난한 살림에 먹을 것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일본 유학파 운동선수 출신인 김철환 교장 선생님이 가끔씩 챙겨주던 폐계나 달걀은 별식이었다. 밤늦게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정신력 하나로 버티는 게 다반사였다. 때로는 대회에 나가기 위해 양파 캐기와 모내기 작업으로 출전비를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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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8월 LA올림픽 62kg급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에서 금메달을 딴 김원기 선수가 시상식에서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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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기는 한번도 힘들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연습 때는 느린 것 같았지만 시합에서는 번개처럼 싸웠다. 엘에이 올림픽 때 함께 출전했던 이연익, 김영남 등과 함께 100개가 넘는 금메달로 함평고를 당시 전국 최강으로 만들었다. 가난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했고, 절실한 신앙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레슬링 덕분에 전남대에 진학하고, 졸업 뒤 상무부대 소속으로 일군 엘에이 올림픽 62kg 그레코로만 금메달은 레슬링에 목숨을 걸듯 살아온 삶에 대한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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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8월 엘에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귀국한 김원기 선수가 어머니(정이례·왼쪽)와 함께 환영의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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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뒤 삼성생명에서 일하면서 탁월한 수탁고를 올리며 업무 영역에서도 그는 정상급이었다. 빚보증을 잘못 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이사 등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재산도 잃고 곤궁하던 시절에도 그가 공부를 해 박사학위를 딴 것은 대학교수를 위한 꿈이었다. 인정 많은 그가 태릉선수촌장이 되었다면 그보다 더 따듯한 지도자는 없었을 것이다. 무슨 무슨 직위가 없더라도 그는 실천으로 베푸는 삶을 보여줬다. 함평중·고 레슬링후원회 회장을 맡아 형편이 어려운 중학교 레슬링 선수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매달 돈을 보냈다. 자식이 없는 그에게 이들이 아들이었고, 상가를 지키는 유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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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원기씨는 엄홍길휴먼재단 홍보이사로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과 봉사를 실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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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직함인 엄홍길휴먼재단의 홍보이사로서 그는 늘 상석은 마다하고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비등기 이사인데도 대충 하지도 않았고, 꼬박 회의에 참석하면서 대접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겸손한 친구는 처음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지금도 핸드폰에는 한달에 2~3번 정도 보내온 그의 문자메시지가 남아 있다. 안녕이란 뜻으로 꼭 붙이던 ‘샬롬’ 인사말이 살아 있는 듯하다. 이제 소천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하지만 작게는 함평중·고 레슬링 선수들을 위해, 크게는 한국 레슬링 발전을 위해 하늘에서도 항상 걱정하고 기도할 것이다. 부유하지 않았어도 남을 위해서 다 쓰고 다 나누고 간 그가 그립다.
최경수/전 레슬링 국가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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