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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16 18:30 수정 : 2017.07.16 20:40

1969년 5월1일 고인이 캐나다로 이민 가던 날 김포공항에서 배웅나온 문인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왼쪽부터 박태순, 이문구, 박상륭, 김수명, 김현. <한겨레> 자료사진

[가신이의 발자취] 작가 박상륭 선생 영전에

1969년 5월1일 고인이 캐나다로 이민 가던 날 김포공항에서 배웅나온 문인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왼쪽부터 박태순, 이문구, 박상륭, 김수명, 김현. <한겨레> 자료사진

박상륭 선생께서 지난 7월1일 돌아가셨다. 고국이 아닌 머나먼 캐나다였다. 아쉽다. 김현, 이문구에 이어 한국문학이 무너지는구나. 잘 아시다시피 박상륭은 194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장수읍 노곡리 부농 막둥이로 태어난 박상륭은 한학을 공부한 아버지 밑에서 시를 배운 똑똑한 아이였다. 어머니 나이 45살에 본 늦둥이였다. 쭈글쭈글하고 시커먼 어머니가 부끄러워 책상 아래로 숨은 아이가 박상륭이었다. 장수초등학교, 장수중학교, 장수농고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장수농고를 졸업할 때, 500편에 이르는 시를 썼고, 장차 대통령을 꿈꾸는 조숙한 학생이었다.

그도 짝사랑한 동네 여대생 누나가 병으로 죽고 대학입시에 실패한 뒤, 중앙대학교 전신인 서라벌예대 문창과에 진학한다. 거기서 필생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이문구를 만난다. 김동리는 유독 이문구를 좋아했다. 제2회 김동리 문학상을 받았을 때, 친구 이문구가 준 상이라고 좋아했던 박상륭.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 이름으로 술을 산다며, 많이 드시고 밤길 즈려밟고 가시라던 박상륭. 자기는 파이프를 물고 있으면서 양주와 권련을 연신 권하던 박상륭. 자기에게는 친구가 두 개 있는데, 김현이 그렇게 갔고 하나 남은 이문구마저 아쉽게 눈을 감았으니 천하에 외로운 놈이 되고 말았구나고 눈물을 훔치던 박상륭. 상륭이가 캐나다에서 날아올 때까지 눈을 못 감고 산복이(이문구의 아들)가 션찮어서... 말을 잇지 못하던 병상의 이문구가 떠오른다. 사진을 찍으면 거한들 사이에 낀 한 마리 쥐새끼 같다며 낄낄거리던 박상륭. 과대 포장했지만, 사석에서 만나면 한창훈을 명천(이문구)으로, 글 쓴 사람(유용주)을 자기 분신으로 생각했던 박상륭. 우리에게 가죽 가방과 노트를 선물한 박상륭. 술은 큰 유리잔으로 자꾸 첨잔을 하며 양껏 마시라던 박상륭. 귀한 쿠바산 말뚝시가를 주며 피우라던 박상륭. 친구와 많이 싸우라고 당부한 박상륭. 광화문과 일산에서 버선발로 뛰쳐나오던 박상륭. 문학 평론하는 김진수에게 원어로 된 책을 주며 한번 출판해 봐요, 하던 박상륭. 예쁜 사모님을 둔 덕분에 알약을 한움큼 털어 넣던 박상륭. 아름다운 딸(박상륭은 슬하에 딸만 셋을 뒀다)과 사위 사진을 보여주며 모두 성공해 대학 교수가 됐다며 즐거워하던 박상륭. 맛집에서 선배라고 죽어도 자기가 계산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박상륭. 고국에 오면 절대 장수를 찾지 않은 박상륭. 집안 조카들이 원불교 교무가 많은 박상륭.

그도 하늘에 뜻에 따랐다. 언젠가 신문 일면에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박상륭이 일번이라고 썼다. 과한 표현이 아니다. 그 많은 저서 중에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만 인용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국문단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누구들처럼 성명서를 찢지 않고 그는 시체실 청소부로 일하면서 모국어로 소설을 썼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고국을 떠났을 뿐이다. 문제는 번역이다. 이 자리에서 소위 박상륭 문학을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럴 만한 그릇이 못된다.

잘 주무십시오.

우리도 곧 따라 가겠습니다.

유용주/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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