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7.13 20:13
수정 : 2017.07.1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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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9일 도쿄에서 열린 곽동의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위원장 추도식에서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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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곽동의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장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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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9일 도쿄에서 열린 곽동의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위원장 추도식에서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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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일운동의 큰 별’ 곽동의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10일 별세했다. 향년 86. 지난날 17일 서울 서대문 통일의길평화센터에서 30여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추모식을 한 데 이어 19일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 통일단체들이 마련한 공식 추도식에 남측위원회 대표단과 함께 다녀왔다. 그런데 아쉽게도 국내 언론에서는 부음이 제때 전해지지 않아 뒤늦게나마 고인의 발자취를 남기고자 한다.
고 곽동의 선생은 193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리츠메이칸대학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뒤 60년 재일한국청년동맹, 73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 89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92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결성까지 한평생 한반도 통일운동의 한길을 걸어왔다.
선생은 조국이 둘로 갈라지고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으로 고통받을 때, 일본의 동포들·양심세력들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해 헌신분투했다. 특히 수십년간 반국가단체 활동가라는 멍에를 쓰고 탄압받으며, 고국 방문마저 차단되는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투쟁해왔다.
2000년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의 성사 등으로 막혔던 휴전선이 열리면서, 선생은 현해탄을 건넌 지 44년만인 2004년 10월 한통련 고국방문단으로 처음 귀국할 수 있었다. 2005년 8·15기념행사에 이어 2006년 4월 세번째 방문 때 선생은 1961년 박정희 쿠데타세력에 의해 간첩 누명을 쓴 채 31살 이른 나이에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받았던 마지막이자 유일한 옥중편지를 최초로 공개하기도 했다. 재일동포인 조용수는 ‘한국청년연맹의 두 아형(선배) 곽동의·김중태’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정치재판 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처형까지 당할 줄은 몰랐던 것’으로 보여 안타깝게 했다. ‘조용수 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재심 권고를 거쳐 2008년 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후 47년만의 복권에 누구보다 감격스러워한 선생이었다.
선생은 2005년 금강산에서 6·15 위원회가 결성되고, 6·15 해외측 공동위원장으로서 중책을 맡으신 이래 한시도 멈추지 않고 국내외 각계가 단결할 수 있도록 부단히 애썼다. 그야말로 삶의 마지막까지 민족의 자주와 평화통일, 대단결을 위해 매진해 온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9년에 걸쳐 남북해외간 교류가 차단되고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달아 6·15 위원장 회의가 어렵사리 열릴 때에도 선생은 항상 청년같은 모습으로 6·15선언 이행과 사업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새 민주정부를 세워 다시 남북관계의 길을 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움트는 이 때, 선생이 떠나니 참으로 안타깝고 애통하기 그지없다.
비록 선생은 평생 염원해온 통일조국을 채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고인께서 남기신 민족대단합의 정신과 불굴의 통일 의지는 고스란히 후대들에게 전해지고,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해외 온겨레의 단결된 힘으로 6·15선언을 온전히 실현하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며, 제2의 6·15통일시대를 함께 열어 낼 것이다. 부디 분단의 철책 없는 하늘나라 통일조국에서 영면하소서.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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