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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22 20:18 수정 : 2017.05.25 15:33

칸영화제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 차린 고 김지석 선생 추모 공간.

【가신이의 발자취】 김지석 BIFF 부집행위원장의 영전에

칸영화제 한국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 차린 고 김지석 선생 추모 공간.
입학하자마자 영화 동아리를 찾았다. 부산대학교에는 두 개의 영화동아리가 있었다. 하나는 ‘영화연구회'였고 다른 하나는 ‘새벽벌'이었다. 나는 꽤 한량 같은 대학생이었고 한량처럼 살고 싶었다. 영화연구회는 동아리 모집 요강만 봐도 한량스러웠다. 영상 운동 중심의 새벽벌은 달랐다. 노동자니 민족이니 투쟁이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애에게는 도무지 삼켜지지 않는 단어들이 가득했다.

‘영화연구회'는 연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막걸리만 마셨다. 나는 42기였다. 역사가 꽤 오래된 동아리라는 의미였다. 연구는 하지 않고 항상 막걸리만 마신 건 아니었을 것이다. 동아리에는 전설같은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김지석이었다. 한 선배가 말했다. “지석 선배는 동아리에 관심 없었어. 혼자서만 다녔대.” 그러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만 열심히 공부하던 김지석이란 사람은 뭔가 잘 풀리지 않아서 광안리에 프라모델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가게는 결국 망했고, 다시 영화를 한다고 했다. “한 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별로 반기시는 눈치는 아니더라고.” 막걸리만 마시는 한량 영화광 후배들에게는 그리 한량한 선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지석 선생을 처음으로 만난 건 1996년이었다. 부산영화제 창립을 준비하던 위원회가 부산 전역의 대학교 영화 동아리에 자원봉사를 요청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것들을 붙이고 뿌리는 노가다를 좀 했던 것 같다. 김해공항에 차를 타고 가서 해외에서 온 손님들을 픽업해 수영만 영화제 사무실로 에스코트하는 일도 했던 것 같다. 모두가 꿈에 부풀어있는 시기였다. 부산에 국제영화제가 생긴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올라 프린트물을 붙이는 단순 노동을 하면서도 신이 났다.

김지석 선생을 만났을 때 “선배님 저 부산대학교 영화연구회 42기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지석 선생은 피식 웃었으나 별 답변이 없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굳이 학연과 동아리연을 어떻게든 이용해 환심을 사보겠다는 나의 얄팍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 듯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담기는 어려웠다. 나는 첫 부산영화제를 보지도 못한 채 군대에 갔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 영화잡지 <씨네21>에 들어갔다. 부산영화제로 출장을 갈 때마다 김지석 선생을 봤다. 영화제를 취재하다 길에서 마주치면 선생은 정말 놀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어떤 영화를 봐야하고 어떤 감독을 인터뷰해야하는지 꼼꼼하게 일러줬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선생의 눈은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빛이 났다. 영화인들은 “김지석은 진짜 영화주의자지"라는 말을 종종 했다. 나는 대체 ‘영화주의자'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단어가 사전에 실리는 날이 온다면 예시 사진으로는 분명히 김지석 선생의 얼굴이 실릴 것이라 확신했다.

김지석 선생과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건 몇 년 전 홍콩영화제에서였다. 빅토리아 만이 보이는 꽤 오래된 딤섬 집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닭발 요리를 시켜서 열심히 뜯어먹고 있으니 선생이 흐뭇하게 보며 물었다. “김기자는 그런 것도 잘 먹네?” “네. 전 못 먹는 게 없습니다 선배님". 또 선배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는 그 뒤로 김지석을 보지 못했고, 영화제는 폭풍우를 맞기 시작했다. 김지석과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은 블랙리스트 정권에 의해 쫓겨나고 물러나야만 했다. 김지석 선생은 자신의 방식으로 싸웠다. 그의 방식이란,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영화제의 거목 답게 뿌리를 깊이 박고 외부의 바람에 가지만을 내어주며 버티고 또 버티는 것이었다.

부산영화제는 김지석이 필요했다. 부산영화제를 찾던 아시아의 모든 감독들에게는 김지석이 필요했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허브가 된 것은 산업적인 가치가 대단해서만도 아니었다. 부산영화제가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모두가 몰려들 만큼 위대한 장소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김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기간이면 언제나 비행기를 탔다. 부산영화제에 처음 영화를 출품한 이후 거장이 된 아시아의 감독들과, 부산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고 싶어하는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김지석은 부산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였다. 그 다리는 정치적 권력의 폭풍 앞에서도 절대 무너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김지석 선생은 칸영화제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겨우 열흘 전,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던 날이었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으로 한은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다. 이명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 영화제가 혹독하게 탄압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직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이제는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김지석 선생이 그가 말한 희망이 발화하는 시대를 목도하지 못한 채 가버린 것이 애석하다. 하지만 김지석은 도쿄와 베이징과 홍콩과 자카르타와 마닐라와 테헤란에 있을 때조차 부산에 있었다. 칸에서 심장마비로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에도 부산에 있었다. 정권이 또 바뀌고 집행위원장이 또 바뀌고 스탭들이 새로운 세대로 바뀌어도 여전히 부산에 있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김지석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지석은 부산국제영화제였다. 김도훈/허프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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