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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23 19:24 수정 : 2017.03.23 22:40

오재영 정의당 원내대표 정무수석.

오재영 정의당 원내대표 정무수석을 보내며

오재영 정의당 원내대표 정무수석.

지난 22일, 내 생일날 그가 세상을 떠났다. 급작스런 심정지로 눈을 감은 오재영은 나와 대학 동기다. 1967년생 향년 50. 눈물 많은 나지만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전남 보성군 득량면, 스스로 깡촌이라 말하는 곳에서 태어난 그는 87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다. 우리 둘 다 앞에 나서는 데는 소질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맨 앞에 서 있는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서총련)에서 투쟁국장도 아닌 ‘투쟁국원’을 했다. 시위를 조직하느라 하도 서울시내를 돌아다녀 택시기사보다 지리를 더 잘 알았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열정 가득한 깊은 눈빛, 쉼 없이 뭔가를 설명하며 움직이는 손짓, 때론 현란하고 때론 귀엽기까지 하던.

오재영은 대학을 마치고 동기 네명과 독산동 지하 단칸방에 함께 살았다. 구로에서 청년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하루는 그 방에 도둑이 들었는데 훔쳐갈 게 하나도 없었는지, 혹시나 해서 투명 테이프로 두툼하게 싸놓은 서류봉투를 가져갔다. 뒤늦게 돈이 아닌 걸 알고는 내팽개치는 바람에 골목에 온통 종잇장이 날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 다섯명 중에 벌써 둘이 세상에 없다.

그는 늘 계획적이고 철저하려고 노력했다. 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구속됐을 때 그는 면회 온 친구에게 이런 쪽지를 건넸다. ‘감옥에서 나가면 다시 활동할 것이니 아무도 딴 데로 튀지 마.’ 출감 뒤 청년회 활동과 더불어 직장에 다니던 그는 민노당이 만들어지자 주저 없이 들어가 조직실장과 노회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노 의원이 ‘삼성 엑스(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가 다시 국회로 복귀하자 이번에도 안정된 직장을 떠나 진보정치 전선에 섰다. 그리고 그렇게 전선에 다시 선 지 채 1년도 안 되어 영면에 들었다. 슬프고 비통하다.

그는 늘 주위 사람들을 잘 챙겼다. 잘난 사람들이 떠들다가 간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데 능숙했고, 잘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의 열정은 정말 넘쳐났다. 쉼 없이 뭔가를 구상하고 실제로 만들어냈다. 확실한 것은 오재영 같은 사람이 정말 흔치 않다는 점이다. 무서운 인상에서 품어내는 푸근한 미소와 한마디 한마디 강조해대는 진정성 있는 말투, 생각이 다른 이들도 그를 결코 미워할 수 없었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본 적이 오래다. 오래전 같은 단체에서 활동할 때는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는데 그 뒤로는 뜸했다. 세상을 뜨려고 그랬을까, 전날,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 내가 전화를 조금만 일찍 했더라면. 슬픔과 미안함, 분노가 교차한다. 정상적인 사회였으면 꿈꿨던 세상을 하나씩 진득하게 이뤄냈을 그다. 이제 시작인데, 그는 떠났다. 그가 앞장섰고 떠났으니 산 자의 남은 몫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벗이여, 잘 가게나.

황필규/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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