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1.24 19:28
수정 : 2016.11.24 21:55
가신이의 발자취, 이원주 동지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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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원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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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그가 허망하게 떠났습니다. 황당하고 억울한 심정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토록 단단하던 그가 기껏 그런 병에 쓰러지다니 믿기 어렵습니다. 두어달 전, 그가 마지막 투쟁을 벌이고 있는 병실에서, 우리가 그를 강한 존재로만 보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위로나 격려 따위가 그에겐 필요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이원주, 그를 처음 만난 것은 38년 전 대학생 때였습니다. 우리는 그 때 두려움에 떨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단 한 사람, 바위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 이원주였습니다. 겨우 스물세 살, 키는 160 센티미터가 겨우 될 듯한 작은 체구, 하지만 우리는 그를 믿고 거대한 권력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유신체제 말기, 우리는 바위 같은 그를 믿고, 아무 사심도 미혹도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과 냉정을 유지하는 그의 판단을 믿고 우리는 불의한 거대 권력과 투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사령관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넘어서버린 듯한 그 용기는 어디서 왔을까 오늘 새삼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마침내 기적처럼 승리하였고, 1980년 서울의 봄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의 봄은 그가, 이원주가 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서울의 봄은 스물다섯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습니다. 사심에 찬 어른들이, 양김이니 삼김이니 이런 사람들이 그 소중한 봄의 꽃밭을 망쳐놓을 때, 그 꽃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일군의 청년들이 있었고, 그들의 지도자는 이원주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존재였고,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서울의 봄의 지도자였고, 기획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에 이름이 남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중에 경찰이 ‘무림’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그 청년들의 존재는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누구에게도 선동 당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은 청년들, 그들의 눈으로 서울의 봄을, 그리고 거듭 반복되는 오늘 한국 민주주의 혁명의 본질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에도 바로 그런 청년들이 있고, 이원주의 아들과 딸, 헌우와 선주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눈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원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거쳐 76년 서울대 사대 입학, 80년 ‘서울의 봄’ 투쟁 주도, 계엄법 위반 구속, 군기무사에서 고문, 83년 중학교 교사로 참교육 실천, 86년 인천 대성산업 노동운동 투신, 87년 인천민주노동자연맹 설립 주도, 인천 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 설립, 88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정책실장, 91년 민중당 토지주택문제 대책위원장·인천 동구 지구당위원장.’
그의 길지 않은 이력을 돌아보니, 정당한 평가와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버린 그의 삶이 억울합니다. 그나마 2004년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아 24일 광주 국립5·18묘지에 잠들었습니다. 아마 그는 억울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젊은 날, 이름도 남김없이 조국에 청춘을 바치자고 다짐하고 또 진정으로 원했기 때문에, 그의 넋은 아무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가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친구, 이원주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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