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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0 18:30 수정 : 2006.03.10 18:36

[가신이의 발자취] 전북 문화계 큰어른 민윤식씨

1919년 3월28일(음), 전북 정읍군 정우면 우산리 서산부락에서 4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88살을 일기로 1월29일 설날 밤 세상을 뜬 계원 민윤식씨는 작달만한 키에 후덕하기만 한 재사였다. 가난한 시골 한약방 의원이던 부친을 닮아 그 역시 남 퍼주는 데 이골이 났다. 독학으로 익힌 한의술을 밑천으로 고인은 27살 나던 해 전주시 완산구 전동 1가 223에 ‘동양당한의원’을 연다. 8년전 맞은 중풍과 싸우면서도 원근에서 찾아오는 환자를 돌봤다. 병원 앞에 좌판꾼들이 늘어서도 쫓기는커녕 아픈 기색이 있으면 맥을 짚어보고 약을 지어보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께부터는 전북 지역 연극인들 지원에 나섰다. 지역 연극협회에 수백만원 돈을 내면서도 “용처는 알아서 하라”며 털털 웃을 뿐이다. 연극인들의 동양당한의원 출입이 빈번했음은 물론이다. 현재의 ‘전북 연극상’은 ‘계원 연극상’이 원뿌리였던 것이다. 큰딸 귀임(62)씨는 “아버지가 환갑잔치때 남사당패를 불러 꼽추춤을 추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풍류를 즐길 줄 알기 때문에 가난한 연극인들 사정을 이해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계원 선생은 홀로 배운 글솜씨도 일품이었다. 팔순기념전 등 전시회도 수차례 열었다고 한다. 추사체로 힘찬 필체로 쓴 글은 지금도 전국 곳곳에 걸려있다. 전북지역 문화예술제인 풍남제때 사재를 내 ‘전국서화백일대상전’을 열어 서예대중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고인은 생전 남을 두고 뒷공론을 하지 않은 것으로 가족들이나 주변사람들은 기억한다. 네째아들 병훈(54·전주박물관 학예실장)씨는 “아버지는 남을 욕하거나 나쁘게 말씀하시는 걸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먀 “늘 웃고 남에 대해 관대한 까닭에 장수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보다 1년 먼저 태어나 보름 앞서 간 민관식 전 국회의장과는 집안 동생뻘로 가깝게 지내며 장학회도 함께 하며 했다. 또 병을 얻고서는 자신의 삼우제를 집전한 문규현 신부한테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1988년 민윤식씨의 칠순을 맞아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의학과 한학 그리고 서예에 조예가 깊어 언뜻 보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정반대였다. 세째 병록(56·동국대 교수)씨가 60년대 후반 딴따라들이나 가는 줄로 인식되던 연극영화과에 응시하겠다고 하자 “각자 앞날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라며 선뜻 승낙했다고 한다. 자녀들 종교만 봐도 그의 개방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병환 중에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다시 한의대를 나와 가업을 잇고 있는 큰아들(병부·60)을 따라 원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 큰딸과 둘째 아들도 천주교. 반면 둘째 딸은 불교, 세째 아들은 기독교다. 고인은 평소 “형제간 종교가 달라도 화목하면 그게 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이 기사는 독자 조영주(서울 강남구 신사동)씨가 제보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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