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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0 17:27 수정 : 2006.01.21 14:44

[제2창간] 한겨레스타 ⑥ 강재훈 선임기자


한겨레 스타의 여섯번째 주인공은 강재훈 선임기자입니다. 강 기자는, 독자 김영주님이 “한겨레 제2창간 소식 지면을 통해 만나고 싶은 기자”로 추천해 주셨습니다.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다른 독자에게 소개하는 게 어떨지 제안을 드렸더니 응해주셨습니다. 김영주님은, 2003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월13일 한겨레신문사 부근 효창공원에서 이뤄졌습니다.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 한 편의 시가 주는 울림이랄까!

‘도심 작은 습지의 기적 … 생명들이 아우성친다’, ‘거울에 비친 을사치욕 100년’, ‘백구는 무엇을 기다릴까요’ 등 화보나 ‘사진으로 떠나는 길’(36.5도 생활·환경 섹션)에서 만나게 되는 그의 사진은 어김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생각을 나누어주었다.

비가 내렸다. 겨울가뭄을 해갈시켜줄 비가 내렸다. 비가 머츰해진 효창공원에서 강재훈 선임기자를 만났다. “독자의 눈길을 잡지 못하는 사진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늘 남과 다르게 찍어야 한다는 각오로 카메라를 잡는다는 그의 표정은 단단했다. 이 사진이 독자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 것인지를 더불어 고민할 때, 같은 현장에서 취재를 했더라도 다른 신문사의 지면과 변별력이 생길 거라고도 했다.

“네모 창을 빌려 세상을 이야기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사진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1986년 신문사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고교 때부터 사진을 배우고 익힌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일보> 출판사진부, <일요신문>, <세계일보> 등을 다녔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한 적도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찍은 사진들이 언론사 시각에 따라 골라지고 어긋나게 쓰이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서울경제신문>에 잠깐 일할 때 한겨레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다른 언론사와 달리 사람 사는 조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곤한 월급을 감내하며 열심히 일하는 동료 선후배들에게 동화되어 세상 등대를, 독립 운동가를 자처하며 12년째 한겨레에서 일하고 있다. 취재현장은 물론이고 데스크든 편집위원이든 내가 밀리고 겁내면 우리 독자들은 경쟁력 뒤지는 사진을 볼 수밖에 없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한다는 그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사람 냄새 나는 ‘한겨레’ 에 끌렸다

삼풍백화점 생존자를 취재하려
무너진 지하에 몇 시간을 쪼그려있어도
시베리아 북한 벌목공을 취재하려
몇날며칠 산속을 헤매고 납치 위험에 처해도
‘한겨레’ 자긍심으로 버텼다

여러 차례 사진전도 연 ‘작가’ 지만
언제까지나 나는 ‘한겨레 사진기자’ 다

지난 해 4월, 경험 많은 기자들이 현장에서 일하면 독자들에게 좀더 알찬 기사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한겨레 편집국의 판단이 있었다. 그는 권태선 국장에게 간곡히 요청했고, 그 청이 받아들여져 후배에게 데스크를 물려주고 부장급 현장기자로 자리 옮김을 했다. “‘한겨레’이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타 언론사와 차별화된 사진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새 편집국장이 언론사 최초로 사진부 기획팀을 둔 덕분에 그는 첫 번째 기획팀장 겸 현장에서 뛰는 선임기자로 기획사진을 책임지고 있다. 요즘은 ‘보도사진’이 아닌 ‘신문사진’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며 사건·사고·정보 전달에 국한하지 않고 세상 모든 이야기를 지면에 담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그는 또 스터디 등을 통해 일반적으로 찍히는 사진이 아닌,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을 찍도록 후배들을 이끄는 일도 한다. “오늘 발표된 2005년 한국보도사진전에서 우리 한겨레 사진부가 최우수상을 비롯해 후배기자 6명이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2000년 올해의 사진기자상’을 받을 때 자신 또한 저리 웃었겠거니 짐작 가능한 웃음을 웃었다.


1995년 6월29일. 마감 후 후배들과 충무로 골뱅이 집에 가 맥주 뚜껑을 따려는 순간 삼풍백화점 붕괴 속보가 텔레비전 자막을 타고 전해졌다. 돈만 내고 서초동으로 달려갔다. 매몰된 생존자들을 찾아 취재해야 하는데 사진부장의 첫마디가 “강재훈씨! 지하엔 들어갈 수 없나?”였다. 중요한 것은 통제되어 지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부장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하 3층으로 잠입했다. 숨도 못 쉬고 몇 시간이고 쪼그려 기다리는데, 한 방송사 기자가 특수 카메라를 끌고 들어와 구조작업을 생방송으로 잡아냈다. 청소용역원 23명이 생존상태로 구조된 특종이었다. 그 와중에 그의 존재가 외부에 노출되었고, 결국 그의 사진은 여러 신문사가 공유하게 됐다. 가장 아쉬움이 남는 취재라고 했다. 94년 한겨레에 오자마자 시베리아 북한 벌목공을 취재 갔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다른 언론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으로 다닐 때 무조건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취재기자가 북한 기관원들에게 납치 형태로 지프에 실려 가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한겨레’라는 자긍심으로 버텨냈다. 덕분에 북한 벌목사업이 기존 보수언론들이 얘기한 것과 다르다는 걸 지면을 통해 알릴 수 있었다.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 만큼 사진작가로도 유명한 그지만 어떤 경우든 한겨레 사진기자 구실에 충실하고 싶다고 했다. 기자로 일하면서 개인적인 작업을 하려면 시간을 쪼개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철칙이 있다. 어느 분교 운동회에 꼭 가서 사진 작업을 해야 하는데 사진부 조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운동회를 포기했다. 프랑스 몽펠리에 미술관 초청 ‘한국작가 사진전’, 강원 다큐멘터리 사진 공모전, 동강 사진박물관 개관 사진전에 초청된 작가 중 현직 사진기자로는 그가 유일했다. 사진기자를 대표할 수 있다, 부담이 컸고 그래서 더 열심히 작업했다.

“기자든 작가든 사진계에서 제몫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사진문화 운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좋은 사진을 남길 때 대한민국의 사진문화가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들꽃 피는 학교, 분교’ 이후 8년 만입니다.” 오는 5월, 여덟 해 동안 작업한 ‘산골분교 운동회’ 사진전을 한다고 귀띔해주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우면서도 힘찼다.

잎 내고 꽃 피우고 열매 맺던 세월을 나이테로 담으며 침묵으로 서있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그를 만나고 오는 길, 따뜻한 시선으로 들려줄 세상 이야기가 벌써 기다려졌다.

김영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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