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04 21:15
수정 : 2006.01.0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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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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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전망대
지난 연말 일어난 허준영 경찰청장의 사퇴 파문을 다룬 사설들은 신문이 문제의 본질적인 성격을 놓쳤음을 드러냈다. 사퇴 파문은 표면적으로 농민들의 과격시위와 경찰의 과잉진압을 둘러싼 논란으로 진행되었다. 사설에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과격시위에, <한겨레>가 과잉진압에 초점을 맞춘 것은 평소 그들이 펴온 논조와 다를 바 없다.
<조선> <중앙> <동아>의 사설은 대체로 과잉진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찰청장이 사퇴함으로써 앞으로 “경찰이 폭력시위에 적극 대처하지 않을 부작용”을 우려했다. <중앙>은 12월28일치 사설에서 불상사에 대한 책임 추궁을 의식해 과격 폭력집회를 방치할 위험을, 동아는 12월30일치 사설에서 경찰청장의 사퇴가 가져 올 공권력의 위축을 경고했다.
<조선>은 12월30일치 사설에서 청장의 사퇴과정을 지켜본 경찰이 “앞으로 또다시 쇠파이프를 휘두르거나 경찰차에 불을 지르는 식의 폭력시위와 맞닥뜨릴 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물어보나 마나”라는 ‘예언’까지 했다. 조선은 “이제 폭력시위에 맞설 수 있고, 맞서야만 하는 사람은 대통령 혼자뿐인 셈”이라는 말로 경찰의 소극적 대응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에 <한겨레>는 12월28일치 사설에서 경찰청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공은 자신이 챙기고 책임은 부하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장수를 과연 아랫사람들이 믿고 따르겠는가?”고 다그쳤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은 경찰 총수가 본인이나 임면권자의 결단이 아니라 정치적 외압에 밀려 자리를 물러났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사태를 방치했다는 점이다. 이점을 정면으로 문제 삼은 사설은 <조선>뿐이었다. “폭력시위와 진압경찰 간의 입장이 엇갈리는 이 미묘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가치판단과 결정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피했다”는 것이 <조선> 사설의 요지이다. 그러나 <조선>도 노 대통령이 허 청장을 ‘사퇴시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퇴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갖는 정치적 의미에 주목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읽을 수 있었던 문재인 수석이 사퇴를 요구했음에도, 허 청장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수석의 사퇴 요구가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허 청장의 이와 같은 반응은 대통령의 뜻이 경찰총수에게도 먹혀들지 않고 있는 현실을 말해 준다. 이런 사태를 대통령의 정치력 빈곤이라고 볼 수도, 레임덕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대통령의 뜻이 관철되지 않고 있는 사태는 뒤이어 일어난 개각파문, 곧 대통령이 기용하는 장관에 대한 여당의 도를 넘는 거부사태로 재현되었다.
이번 사퇴 파문의 본질은 공권력의 위축이나 허 청장 개인의 비겁성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시위과정에서 농민 두 사람이 사망한 것은 경찰의 총수가 책임져야 할 사태다. 경찰의 총수란 이럴 때 책임지면서 바람막이가 되라는 자리이다. 경찰총수는 책임을 시위진압에 임하는 일선 경찰로 떠넘길 일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므로써 여파가 일선에까지 미치는 것을 막아낼 책임이 있다. 사설은 이 책임을 대통령이 분명하게 묻지 못하고, 외압에 대한 굴복이라는 모양으로 결말이 난 것은 대통령 스스로 국정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참으로 우려할 만한 사태라는 점을 부각시켰어야 한다.
성한표/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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