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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7 14:39 수정 : 2019.06.27 15:40

“선배, 이 사진…제 2의 쿠르디…”

지난 26일 출근해 자리에 앉기도 전, 옆자리 짝궁 백소아 기자가 울 듯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들이밀었습니다. 그곳에는 한눈에도 산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이 인식되자마자 남미, 카라반, 국경, 이민자... 키워드가 머릿 속에 떠오릅니다.

백 기자는 디지털사진팀장에게 얼른 이 사진을 온라인에 보도하라고 알려준 것이겠지만, 저는 따르지 못했습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신의 모습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래 본문에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서 강을 건너다 숨진 부녀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세계 여러 분쟁 지역의 참혹한 사진은 외신 모니터를 통해 수없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물리적인 거리가 주는 심리적 거리감이 있습니다. “나와는 아직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그 거리감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 사진보도에 노출되는 이를 보호해주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저귀 자국이 선연히 보이는 아이와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성의 시신, 거센 물살에 혹여 아이를 잃어버릴까 티셔츠 속에 아이를 넣었을(것으로 추정되던) 그 모습은 남미와 한국의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을 끌어안은 부모의 심정으로 훅 다가옵니다.

엘살바도르 출신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와 두살배기 딸 발레리아가 24일(현지시각) 멕시코 마타모로스의 리오그란데 강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둘은 강을 건너 미국 텍사스주로 밀입국하려다 거센 물살에 휘말려 익사한 것으로 보인다. 텍사스/AP 연합뉴스

이 사진과 맞닥뜨린 많은 이들도 같은 심정이었을까요? 이 사진은 `미국판 알란 쿠르디' 사건으로 미국과 멕시코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며 트럼프 정부의 강경한 반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여론을 다시금 일으키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미국판 알란 쿠르디’ 죽음에 트럼프 반이민 정책 비판 고조

무력분쟁과 정치폭력, 빈곤, 재난 등 끔찍하고 비참한 현실의 한 단면을 기록한 사진은 종종 격렬한 논란의 중심에 놓입니다. 그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과연 이 사진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하는 뉴스룸에서도 쉽지 않은 토론이 이어집니다. 이날도 그랬습니다.

디지털사진팀에서는 놓쳤지만, 종이신문에 실릴 컨텐츠를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지면회의에서는 이 사진을 신문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디터와 편집에디터, 1면 편집자가 의견을 나눕니다. 다음날 아침 이 신문을 받아볼 독자들의 충격도 중요한 고려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멕시코 국경도시 마타모로스에서 리오그란데강을 건너 미국 텍사스로 밀입국하려다가 익사한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와 두살배기 딸 발레리아의 주검이 발견(작은 사진)된 이튿날인 25일(현지시각) 마르티네스의 어머니 로사가 엘살바도르 산마르틴에 있는 집을 찾아온 기자들에게 아들과 며느리, 손녀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산마르틴/AP 연합뉴스
시신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해 가리자는 의견에는 사진에디터가 난색을 표했습니다. 멕시코 언론은 생계형 망명에 나섰던 사진 속 오스카르 알베르토 마르티네스 라미레스(26)가 아내와 딸 발레리아(2) 데리고 강을 건너다 변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급류에 아이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티셔츠 안쪽으로 업었던 탓에 발견 당시에도 함께였습니다. 때문에 발견된 시신의 상태를 모자이크로 가리는 건 이 사진의 본질적 요소를 훼손할 수 있다고 사진에디터는 우려했습니다. 대신 사진이 줄 충격이나 선정성을 덜어내기 위해 흑백사진으로 싣고 크기도 줄였습니다. 메인사진으로는 아이의 할머니가 들고 있는 가족사진을 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 많은 독자들에게는 안타까움과 충격을 드렸을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들이 쉽게 만들어져 소비되며 인간을 대상화하는 상품이 된 면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타인의 고통을 여과 없이 사진에 담고 그걸 보는 행위에 대해 “계속되는 자극으로 오히려 참상에 둔해지도록 만드는 ‘재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다”고 가해지는 비난도 뼈아픈 지적입니다. 때문에 날마다 뉴스현장의 최일선에서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보도하는 일에는 더더욱 세심한 주의와 경계가 필요합니다.

미국 언론학자 수지 린필드는 저서 `무정한 빛-사진과 정치폭력'에서 불편한 사진을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라고, 그럴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고통의 이미지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것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 일은 중단돼야 한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기록은 저항의 기록이며, 우리가 세상을 파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고 그는 말합니다. ▶관련기사 불편한 사진, 그 진실을 직시하라

발레리아의 사진으로 비통함에 빠진 이들이 눈 앞에 펼쳐진 불편한 감정 너머의 세상과 또다른 우리를 이해하도록 움직이는 과정에 그의 말이 하나의 열쇠가 되기를.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그 사진을 마주한 이들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조심스레 그 질문을 건네기 위해 오늘도 성실히 노력하겠습니다.

2019년 6월 27일자 <한겨레> 1면. 이 땅에서 고단하고 짧은 생을 마친 발레리아가 지금은 아버지와 평안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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