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14 22:31
수정 : 2006.01.17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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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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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전망대
황우석 교수 논문의 진실성 공방은 곧 판가름 날 것이다. 그게 신화로서의 ‘국익’이 아닌, 실체로서의 사회이익을 지키는 최선의 길이다. 과학자의 양식과 기자의 양심, 시민의 관심은 바로 이 공익의 보호에 모여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지켜보자. 외국의 수많은 시선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황 교수팀도 엄정하고 신속한 조사를 기다리며 연구에 충실하면 된다. 무책임한 언설, 폭력적 수사를 양산해 온 신문 방송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게 좋다. 매체와 접촉하지 않는 게 모두의 합리적 판단에 이롭다.
황 교수팀은 지금까지 매체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자신을 끊임없이 신문에 노출하고 카메라를 적극 활용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였다. 섀튼 교수가 논문에서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한 바로 전날에도 “논문 300% 신뢰”라는 개인적 전화통화 내용이 “세계적 과학자 황우석 위로”라는 <조선일보> 기사로 흘러나왔다. 그게 다 홍보 능력이라면 할말 없지만, 홍보와 선전의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다. ‘아이러브 황우석 카페’를 둘러싼 최근 논란은 마치 최고스타 매니저가 직접 팬 카페 운영에 나선 것처럼 우습기 짝이 없다.
솔직히 <와이티엔> 기자가 공식 인터뷰를 따오고, 그걸 <문화방송> ‘피디수첩’ 취재윤리 위반의 증거로 방송했을 때 언론학자로서 어안이 벙벙했다. 내용만큼이나 그 방식이 도무지 상식에 어긋났다. 왜 와이티엔 기자 달랑 한명인가? 과연 어떤 상황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나? “피디수첩, 황 교수 죽이러 왔다”는 말은 누가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와이티엔을 택한 게 황 교수팀의 판단인가, 아니면 언론플레이를 도와주는 전문가가 따로 있나?
서울대 조사위원회 설치 바로 전날 황 교수팀은 ‘황우석 죽이기 4가지 의혹’이라는 공식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이 문건은 “피디수첩은 K연구원을 두 번 죽이는 행태를 중지하여야 한다”는 말로 끝난다. 아무리 봐도 순진한 과학자의 말투 같지 않다. 계속해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원 저자가 궁금하다. 이런 상황에서 “황우석 죽이기를 막기 위해 온몸을 던지겠다”는 심정으로 “많은 논의에서 제 의견을 개진했으며 기자회견문 작성 등 업무에도 적극 참여했다”는 이른바 ‘개인적 자문역’이 자신에 대한 ‘음해’에 “죽음으로 맞설 생각”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섬뜩한 ‘죽음’이다.
위협의 말투, 테러의 언어를 관둘 때가 됐다. 피디수첩을 죽이기를 즐기는 ‘저승사자’로 묘사한 살벌한 칼럼으로 충분하다. “타인의 성공을 인정하고 칭찬하기보다 질시하고 깎아 내리려는 악의에서 출발한” “범죄적인 행위”라고 그린 사설로 족하다. 피디수첩을 포함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협박 수단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황 교수 연구 업적을 깎아내리려” 하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마녀사냥”꾼이라고 폄훼한 <김대중 칼럼>으로 죽음의 수사학은 끝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이런 폭언의 선동조차 보통 사람들의 진리를 향한 선량한 의지를 완전히 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누리꾼은 살아 있고, 인터넷이 청년과학자들을 중심으로 그 소통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성이 감정을, 대화가 검열을 이겨내고 있다. 평화가 폭력을, 희망이 공포를 밀어내고 있다. 성역에 대한 집단숭배를 낳은 광기의 언어, 그 양산의 조건을 따지는 일만 남았다. 저널리즘이 신화창조에 미친 듯 복무한 그 실패의 현장을 조사해야 한다. 그게 과학계가 수행할 논문 진실규명에 맞춰 당장 우리가 할 일이다. ‘피디수첩’과 피디저널리즘의 평가는 이 언론자유 회복의 숙제가 끝나고 해도 안 늦다. “화석화된 진보주의자”, “일그러진 진보주의”를 맹비난한 칼럼니스트도 이제 차분히 성찰에 동참해야 한다. 일그러진 한국 민주주의, 그 큰 상처에 대해.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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