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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8 17:36 수정 : 2005.12.08 17:36

홍세화 한겨레 제2창간 독자배가추진단장.

젊은 벗에게,

마침내 문화방송 <피디수첩>팀이 깃발을 내렸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화방송이 깃발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진실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화방송이 깃발을 내린 것은 실상 진실이 말하기를 기다리기엔 그 때까지 감당해야 하는 여론 재판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피디수첩>팀이 취재 윤리를 어겼다는 점은 비판의 도마에 올라 마땅합니다. 나 또한 언론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구성원의 하나로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목적이 아무리 옳다 해도 정당한 수단과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 행위는 지탄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피디수첩 팀은 사회 전체로부터 몰매 맞고 왕따 당하고 있습니다. 줄기세포 연구라는 훌륭한 목적에 편법 기증된 난자를 사용한 행위는 용서되었고 이미 잊혀진 듯합니다. 종교계에서도, 여성계에서도, 아무 말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일방적 현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극우적 사회의 징후를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열광의 뒤에서 오늘 이 땅의 장애인들은 온갖 차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주는 거인에게, 그 거인에게 환호하는 사회에 그들은 감히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아무런 엄호물 없이 그들은 나름대로 고군분투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그들에게 과오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모두의 환호 속에 그들의 과오가 단번에 그들을 꿇어앉힌 듯합니다. 자신에게 던져진 의문부호에 충실한 것으로도 만고역적이 될만한 사안이었습니다. 특종을 얻기 위해 감행했다고 간단히 말하기엔 사안의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개운한 웃음과 교훈을 선사하는 것은 무리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역시 모두가 한 목소리가 아닌 각기 자기의 소리를 낼 수 있을 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골치 아픈 훼방꾼이 무릎 끓었다고 흡족해 하는 듯한 오늘 나는 차라리 벌거벗은 임금님과 함께 할아버지의 개똥 세 개를 생각합니다. 정작 무릎을 꿇은 건 그들이 아닐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무릎 꿇게 한 것은 큰 무리와 다른 시각, 대세를 거스르는 관점, 가시적 성과에 대한 문제의식일지 모릅니다.

홍세화의 ‘할아버지의 개똥 세 개’ 일화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선생은 삼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 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칭찬했겠다. 둘째형이 말하기를 나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 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 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 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 말하기를, 나보다 글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나보다도 겁쟁이인 둘째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하게 되면 세 개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는 커가면서 세 개째의 개똥을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이 할아버님의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 출처 : 홍세화의 아름다운 나라 홈페이지(http://www.hongsehwa.pe.kr/h01_02.html)

  •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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