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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1 15:07 수정 : 2005.11.21 15:21

①홍석현 전 주미대사가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으로 출두한 16일 오전 민주노동당 당원과 ‘엑스파일 공대위’ 회원들이 검찰청사 현관 앞에서 홍 전 대사를 가로막고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②취재하던 중앙일보 기자가 시위자의 목을 잡아 젖히고 있다. ③홍 전 대사가 시위자 쪽을 쳐다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포토라인 무너뜨리면 맞아도 싼 것이 ‘룰’인가

전 세계의 기자, 그것도 사진 기자나 카메라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직면하는 시비와 돌발 상황, 위험을 굳이 거론해 무엇 하랴. 폭언이나 욕설, 육탄 저지쯤은 퇴근 후 술 한 잔이면 툭툭 털 일이고, 실력 행사가 동반되는 취재 방해가 어디 한두 번인가. 게다가 대립하는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 시시비비 속에서 기자가 어느 편인가는 그 현장, 그 순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주먹질이나 발길질 심지어 총탄은 기자가 미국 민주당원이든 공화당원이든 혹은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가리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필자가 사진 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여러 가지 간접 체험이라는 기억 속의 필름을 돌려 보는 것을 양해해 달라. <라이프> 합본에 실린, 포탄 파편에 잘라져 나간 자신의 다리를 찍은 종군 기자의 사진, 남미의 한 군사정권 치하에서 발가벗으면 사진찍게 해주겠다는 요사스러운 조건에 과감하게 무장 저지선을 넘어 총부리 앞에서 나체로 사진을 찍는 기자, 그리고 파란과 격동 속에 사람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안겨준 기자 정신의 귀감은 우리나라도 어느 나라 못지않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살바도르>에 나오는 사진 기자 존 캐시디가 저공비행으로 반군을 공격하는 자국(미국) 전투기를 끝까지 촬영하다가 기총소사에 맞아 숨지고 마는 장면을 보며 사진 기자의 꿈을 가슴에 새긴 적도 있다.

군사정권 시절 KBS의 두 기자가 한 대학에 1박2일에 걸쳐 억류되었을 때 카메라 기자 P씨가 보여준 모습도 잊혀지질 않는다. 신문과 방송을 막론하고 언론의 왜곡 편파 보도가 한창이었던 시절, 대학생 시위로 인한 최루탄 때문에 그 동네 소가 유산을 했는지 임산부가 유산했는지를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지휘에 따라 사실 확인을 하러 나왔다는 두 사람의 기자는 이 글을 쓰는 필자를 포함한 학생들에게 붙들려 긴급하게 마련된 공청회에 세워졌다. 다른 기자가 학생들의 격앙된 질문에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건물 밖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만 연신 피워 대던 카메라 기자 P씨는 말했다. “난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장비만 무사하게 해달라.” 몇 시간에 걸친 성토에 가까운 질문에 시달린 것과 추운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새우잠을 잔 고생을 제외하고는 사람도 장비도 물론 무사했다.


카메라가 ‘밥줄’(사실 어느 누가 이 ‘밥줄’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이기 때문이든 신념의 무기이기 때문이든 간에 그의 또렷하고 단호한 직무 정신은 아직도 서늘한 감동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는 안타깝게도 얼마 후에 다른 취재 현장에서 헬기 사고로 순직했다.

홍석현 전 주미대사의 검찰 출두 때 돌발 시위를 한 민주노동당 당원을 거칠게 제지한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의 행동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사주에 대한 ‘과잉 충성’을 한 ‘경호원 기자’라는 비판과 포토라인을 문란케 한 데 대한 응징이라는 시각차와 대립각이 날카롭다.

‘사진 기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우선은 사진 기자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존경에 비추어 볼 때 ‘경호원’과 ‘기자’라는 단어가 한 묶음이 될 수 있는 이런 상황이 몹시 당혹스럽고 실망스럽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경호원 기자’라는 말을 만들어낸 다른 기자나 기사에 있지 않다. 그 원인은 분명히 홍석현 전 주미대사의 입국 때와 검찰 출두 때 보여준 일부 기자들의 ‘오버’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문한 탓인지, 일례로 인질극을 벌인 김희로씨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 경찰이 그랬던 것처럼 범인과의 긴박한 대치 상황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자로 위장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기자가 경호원으로 착각될 정도로 소속 언론사 사주를 옹위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세계 언론사상 어느 나라에 그런 전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밥줄’ 때문이라고 당사자와 우리 모두가 서로 양해하고 툭툭 털어 버리고 말 수도 있겠으나, 그 일에 대한 해당 언론사 사진부장의 반박은 점입가경일 뿐 아니라 위험천만한 의식을 담고 있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88 서울 올림픽 때 자국 선수의 우승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벌떡 일어섬으로써 결승선 골인 순간을 포착하려는 다른 기자들의 취재를 망쳐버린 한 브라질 기자의 예를 들었다. 그 브라질 기자는 다른 기자들에게 코피가 나도록 맞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진 기자 세계에서 포토라인은 중요한 것이고 그걸 무너뜨린 데 대한 응징은 당연한 것이라는 말을 하려 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응분의 응징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명백한 폭력 행위가 사진 기자들의 공통적인 룰이라는 말인가? 뒤에서 발로 차 거꾸러뜨리고 코피가 날 정도로 폭행하는 것이 공통의 룰이라는 말인가? 특정 직업 세계의 불문율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돌출 사안이라면 모르겠으되 그것이 정말 전 세계 사진 기자들의 룰이라면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사진 기자에 대한 동경과 존경을 거두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일을 끝낸 피로와 애환을 달래는 술자리에서 자기들끼리 ‘그런 자는 맞아도 싸다’고 뒷담화를 하는 것까지야 시비를 걸 일이 아니겠지만 아예 대놓고 그런 폭력 행위를 일반화하고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제발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검찰에 출두하는 자사 사주의 사진을 그날의 시위 때문에 못 찍었다고 밥줄 끊기는 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암바나 초크 같은 격투 기술이 국회의원에 이어 사진 기자들에게까지 필수 과목이 되었다면 정말 ‘이 죽일 놈의 사장 때문에’ 혹은 ‘이 죽일 놈의 사진 기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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