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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9 20:07 수정 : 2005.11.09 20:07

성한표 언론인

미디어전망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년 만들어진 프랑스와 미국의 합작 영화다. 독일의 파리 점령군 사령관이 파리를 잿더미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연합군에 항복하는 사이 그의 방에 놓여 있는 수화기에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는 히틀러의 절규가 들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아프리카계 무슬림 청년들의 소요사태를 두고 신문들이 ‘불타는 파리’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소요사태의 배경과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신문들 사이에 편차가 드러난다. 신문의 성향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이 프랑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서부터 소요사태 자체의 폭력적인 양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였다. 이번 사태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사이의 젊은 무슬림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에 대해 지난 8일치 <경향신문>은 이민 2세들은 “프랑스 국민이면서도 사회적 차별과 기회 박탈 등을 경험하며 주류 사회와 동화되지 못한 아픔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같은 날 <동아일보>는 “자포자기한 이민 2세대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가 심각한 지경”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사태가 프랑스 정부 이민정책으로 인해 축적된 내부모순의 폭발이며, 이를 해소하려는 사회통합정책이 실패한 것이라고 보는 데는 신문들이 대체로 일치하지만, 강조점은 저마다 다르다. 8일치 <한겨레>는 이것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유럽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모순이라고 지적했는데, 같은 날 조선일보의 ‘만물상’은 이번 사태를 종교 인종갈등의 차원에서 설명했다. <조선일보>는 특히 프랑스 폭도가 공권력에 정면 도전했다면서 구멍 뚫린 치안을 강조했다.

그러나 신문들이 미국 언론의 시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미국 언론들은 이번 사태를 사회통합정책의 미국모델을 비판해 온 프랑스(유럽) 언론에 대한 반격의 빌미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어이없는 일은 “이번엔 프랑스가 그대로 당했다”는 7일치 <조선> 기사처럼 한국의 신문들도 여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태를 보도할 때 그 사회와 역사에 대해 철저히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으로 55명이 죽었다. 그러나 신문들이 ‘폭동’ ‘소요’라고까지 표현하는 이번 프랑스 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8일까지 1명이다. 프랑스에서는 시위, 파업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일상적이라고 할 정도이다. 집단적이고 과격한 의사표현을 참아낸다는, 톨레랑스(tolerance)가 프랑스인들에게는 익숙하다.

신문들은 사회통합 정책의 프랑스 모델이 실패했다고 하면서도 프랑스 모델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미국과 프랑스의 사회통합 정책의 차이는 미국은 동화정책인데 반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경우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이다. 이번 사태는 그동안 미국 모델보다는 더 잘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모델조차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할 만큼 사회통합이 어려운 과제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들과 비슷한 외국인 노동자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이번 사태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런 문제를 미국과 유럽은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장단점은 무엇인지를 심층 보도해야 할 때다.

성한표/언론인·실업극복국민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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