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7일자 A3면 PDF.
|
[점검] 언론의 ‘스포츠중계식’ 선거보도 문제점 없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재팬시리즈, 월드시리즈 그리고 10·26 재선거의 공통점은? 답은 ‘4:0’이다. 적어도 신문의 선거보도는 스포츠 경기와 다름없는 점수제로 바뀌었다. 10·26 재선거가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언론의 ‘스포츠중계식’ 선거보도 태도를 놓고 뒷말이 나오고 있다. 언론은 선거 때마다 “경마식 보도, 전장 구도식 보도를 자제하고 정책 중심의 선거보도를 하겠다”고 외쳤지만, ‘이번 재선거는 스포츠중계식 보도라는 선거보도의 새 지평을 개척했다’는 악담이 들린다. 0:4, 0:27, 2:1, 2:2…한국시리즈도 아니고?
10·26 재선거 결과를 다룬 27일자 주요 일간지들의 1면 머릿기사 제목만 열거해 보자. “한나라당 재선거 전승”(<한겨레>), “열린우리 4·30 이어 또 전패”(<중앙일보>), “여, 재선거 4곳 또 전패”(<한국일보>)… 모두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전승’, ‘전패’ 등의 표현으로 선거를 전쟁에 비유하는 ‘전장 구도식’ 보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보도는 선거결과뿐 아니라 선거운동 과정에 대한 보도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새판 짜기…각개 약진…정치권 꿈틀”(동아일보 10월24일자), “‘미니총선’ 10·26 재선거 관전포인트 - ‘TK목장의 결투’ 이변 일어날까”(경향신문 10월21일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재선거 보도 제목이 그중에서도 두드러졌다. 동아일보는 1면 머릿기사 제목을 “0대4 한나라 재선거 4곳 모두 승리”로 잡았고, 사설에서 “10·26 재선거가 열린우리당 참패, 한나라당의 전승으로 끝났다. 유권자들은 4·30 재·보선에서 여당에 ‘0대23’ 완패를 안긴 데 이어 명확한 메시지를 거듭 전했다”고 상기시켰다. 조선일보는 종합면에 “민심은 여 외면, 야끼리 싸운 선거…올 재보선 0:27”이라고 제목을 뽑았다. 조선일보는 “올 선거에서 민심이 ‘0대27’ 성적을 매긴 여당”이라는 사설에서 “(여당은) 올해 두 차례 27개 선거구에서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0대27로 영패를 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연합뉴스는 25일자 “10.26 재선거 ‘경우의 수’와 정국”이라는 기사에서 “막판 판세가 유동적 흐름이지만 대체로 한나라당이 4곳을 모두 이기는 4:0, 한나라당이 3곳을 이기고 나머지가 한 곳을 가져가는 3:1, 한나라당이 2곳을 가져가고 나머지가 2곳을 챙기는 2:2의 결과를 상정해볼 수 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도 24일자 “10·26 재선거 시나리오” 보도에서 “한나라 4-0 완승? 여, 체제개편 급류 여, 대구서 승리? 박근혜 큰 꿈 ‘비틀’ 민노, 10석 회복? ‘거점 사수’ 의미” 등의 중간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0대4’, ‘0대27’, ‘영패’ 등의 단어를 동원한 선거보도는 스포츠중계에서와 달리 환호와 박수 대신 비판에 직면했다.
<동아일보> 27일자 1면 PDF.
|
4·30 재보선 ‘0:23’에서 유례? 언론의 스포츠중계식 선거보도는 지난 4·30 재·보궐선거에서 두드러진다. 당시에도 선거전에 전장구도식 보도가 기승을 부렸다. “‘4.30 재보선' 격전지 르포- 충남 공주·연기”(경향신문 4월23일), “지도부 영천서 ‘마지막 화력' 같은 장소 1시간차 방문 등 신경전 ”(한국일보 4월30일), “재보선 D-2, 충무공 탄신일…여야 `아산대첩’ 지도부 총출동 ‘사즉생 생즉사' 주장” (문화일보 4월28일)… 그리고 선거결과 여당이 23곳의 선거구에서 모두 한나라당, 민주당 등 야당에 패하자 “4·30 재보선 후폭풍 `0:23’ 패자도 승자도 ‘혁신’”(문화일보 5월2일) 등 선거결과를 점수로 표시하는 제목이 등장했다. 이후 ‘0:23’은 4·30 재보선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언론이 4·30 재보선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스포츠중계식 보도를 도입해 이번 재선거에서 ‘0:4’, ‘0:27’ 등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선정주의, 정치권 정보원에 밀착된 취재관행 탓”
“유권자 태도 바람직하지 않는 방향 이끌어 민주주의 위협” 정책선거 실종의 한 축은 언론에 있다는 비판이 높다. 정치권은 흑색선전과 지역감정을 조장해 정책선거를 외면했고, 언론은 정책 분석 대신 “OO가 앞서고 있다. △△가 뒤지고 있다”는 경마식 보도와 전장 구도식 보도 탓에 정책선거를 실종시킨 주범으로 꼽혔다. 그래서 정치권과 언론이 정책중심 선거를 하겠다는 것은 오랜 거짓말 가운데 하나다. 이번 재선거에서도 정책 대결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겨레>가 언론재단의 기사데이터베이스인 카인즈(www.kinds.or.kr)의 기사를 분석한 결과, 각 후보의 정책이나 후보의 정치적 입장, 국회의원이 될 자질 등을 심층적으로 검증한 기사는 보기 힘들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의 조영수 간사는 “언론이 당이나 후보자의 정치적 지향이나 공약 검증보다는 선거 뒤 시나리오 등 정치적 의미나 ‘노-박 대리전’과 같이 흥미 위주로 일관했다”며 “그러다 보니 ‘0대4’식의 스포츠중계식 보도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간사는 “언론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정책이나 후보의 정견을 검증하는 대신 독자들의 관심에 초점을 맞춰 선정적 보도와 제목을 잡고 있다”며 “독자들도 언론의 보도 관행에 따라가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언론이 정책선거를 유도해야 할 책임을 내팽개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신문방송학)는 언론이 따가운 비판에도 경마식 보도, 스포츠중계식 보도를 고집하는 것은 “선정주의적 보도관행과 취재원에 대한 의존성이 크기 때문”이라며 “이번 선거에서 정쟁, 색깔론, 박근혜 등 특정인물 중심의 선거보도가 겹쳐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사안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취재하고 보도해 사회 의제화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며 “언론이 이런 의지보다는 취재원인 정치권으로부터 나오는 정보나 행위를 중심으로 보도하는 데 익숙한 탓에 선거보도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런 언론의 관행이 “선거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유권자들이 정책과 이념에 대한 자기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포츠중계식 보도는 선거의 결과에만 집착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선거에 대한 유권자 태도를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어 반민주주적인 유권자 의식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이번 선거가 ‘정체성 올인’, ‘노-박 대리전’, ‘박근혜의 정치적 승부’ 등 흥미 위주의 스포츠 중계처럼 치러진 것이 정치권만의 책임은 아니다. 독자들에게 충분한 정책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해야 할 언론이 선거판을 흥미 위주의 경마장과 스포츠경기장으로 바라보고 중계한 데 대해 책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