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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14 18:04 수정 : 2005.10.24 02:44

[제2창간] 도와준단 생각 말고 함께한단 생각으로 봐주세요

한겨레신문사에서 가장 바쁘게 사는 이가 누굴까 생각해봤습니다. 최근 제2 창간운동본부 독자배가 추진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홍세화 단장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겁니다. 예전처럼 칼럼을 쓰고, 강연을 합니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이젠 한겨레 독자 10만명을 늘리는 과업까지 책임집니다. 알 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는 이미 한겨레의 ‘판매왕’이기도 합니다. 2002년 입사 이후 혼자서 700여명의 새로운 독자를 만들었으니까요. 아마 이 기사를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도 홍 단장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홍 단장은 누구를 만나건 인사를 건네고 나서는 구독신청서부터 꺼냅니다. “직장에서 보는데요”나 “인터넷으로 보는데요”는 통하지 않습니다. 홍 단장은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갈 때 무엇을 들고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밀어붙입니다. 무엇이 그를 ‘용감’하게 만드는지 들어봤습니다.

누굴 만나건 구독신청서 건네
독자 700명 만든 ‘한겨레 판매왕’
‘민주’ 는 다가갈수록 멀리가죠
한겨레 역할 그래서 더욱 필요합니다
인터넷에서 회사에서 본다고요?
화장실 갈때 보는게 중요합니다

­택시운전사에서 한겨레 기자로, 이젠 독자 배가 운동까지 맡으셨습니다.

=솔직히 위기감을 느낍니다. 한겨레의 샘이 마르고 있습니다. 편집국에 았을 때는 그냥 얘기를 듣고 심각하다고 느낄 정도였는데 구체적인 수치를 들여다보니 더욱 실감이 납니다. 평소에도 독자 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더욱 절감하게 됐습니다. 하향 곡선을 상승 곡선으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새 신문법 시행을 앞두고 각 신문사들이 독자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한겨레만의 방식이 있습니까?

=독자와 주주들이 스스로 한겨레를 권하고 독자를 늘리는 방식은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겁니다. 자발성, 즉 시민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이, 특히 독자와 주주가 직접 나서는 자발성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판촉요원(판매 촉진 요원을 줄인말)을 통해 독자를 늘리는 것은 단기적 효과 있을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 자발성이 없는 구독은 금방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또다시 구독을 강권해야 합니다. 이런 쳇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단기적인 성과를 위해서도 노력해야겠지만, 중장기적인 안정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자와 주주 처지에서는, “한겨레를 보고 주주로 참여했으면 됐지 이젠 독자까지 늘려줘야 하느냐”고 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한겨레를 나의 신문, 나와 함께하는, 내가 만들어가는 신문으로 여겨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한겨레에 종사하는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었느냐는 반문이 가능합니다. 솔직히 많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를 대상화해 ‘도와준다’는 식의 참여는 아니었으면 합니다.

시민의식의 기본은 참여와 비판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비판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비판적 지지라는 말이 있는데, 모든 지지는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만 하지 지지는 별로 없습니다. 매도 맷집이 있을 때 맞고 견디는 것 아닙니까. 이젠 비판보다는 지지에, 참여에 방점을 찍어줬으면 합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굳이 한겨레를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들을 만나면서 적지않게 놀랍니다. 당연히 한겨레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안 볼 때 그렇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 그까지것”과 “한겨레 너마저도”입니다.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한겨레를 보는 눈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와 반민주 구도에서는 한겨레가 민주화 운동의 진지로서 자리매김됐습니다. 절차적인 민주화가 이뤄진 뒤로는 민주화는 다 됐다고, 한겨레의 역사적 구실은 이미 끝났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가갈수록 멀리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가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는 이 때, ‘늠름한 민중의 표상’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이며, 그 속에서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야 하느냐가 중요한 이때, 늠름한 민중의 표상은 민주와 반민주 구도 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겨레가 ‘늠름한 민중의 표상’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구독을 권할 때 쓴소리도 많이 듣지 않습니까?

=솔직히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을 끊겠다는 사람보다 한겨레 그만보겠다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납니다. 한겨레 독자는 이 사회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한겨레와 공유하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끊겠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조·중·동에는 그런 기대도 안 합니다. 조·중·동을 보는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 주류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을테고, 자전거 같은 경품이나 두툼하게 끼어들어오는 전단지가 좋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 논조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한겨레에 더 엄격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때론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겨레 독자 수가 조·중·동의 10%에 미치지 못한다면 문제가 심각한 거지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창간 이후 한겨레와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예를 들자면 정치나 문화 등 다른 분야의 성공에 비하면 한겨레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겨레가 더욱 겸허해져야 합니다. 특히 쌈짓돈을 모아 신문을 만들어준 주주들을 제대로 파악도 못한 점은 뼈아픈 반성이 필요합니다. 한겨레가 들여다봐야 할 문제를 게을리하거나 몇몇 중요한 시기에 실책을 한 것도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상적 긴장이 필요하겠지요. 한겨레를 지식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진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프랑스의 <르몽드>나 영국의 <가디언> 같은 세계적 권위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신문이 되도록 말이죠.

더는 조·중·동이 바라는 대통령이나 국회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앞서나가는 겁니다. 문화 분야에서도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언론에는 반영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경제적 강제력으로 해석합니다. 각 사회의 단위, 구체적으로 보면 대학이나 기업, 지역 사회 같은 곳에서 기득권 세력의 헤게모니는 여전합니다. 이를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가면서 달라질 겁니다.

­한겨레를 직장에서 본다거나 인터넷으로 본다며 구독 권유를 거절하는 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사무실에서 먼 발치에서 한겨레의 녹색 제호를 봤다고 해서, 혹은 건성으로 들춰봤다고 “한겨레 본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침에 화장실에 뭘 들고 가느냐는 정말 중요합니다. 인터넷으로만 정보를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깊이와 폭이 부족한 얄팍한 인식이 형성될 우려가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종이신문을 멀리하게 되면 결국 성찰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고, 책과의 친화력도 잃게 되죠. ‘종이’ 한겨레를 보는 독자가 많아질수록 한국 사회가 더 성숙해진다는 제 믿음이 확인될 날이 꼭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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