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레이온 직업병 보도에서 장애인·혼혈인 차별까지
소수자 삶 주목한 ‘마이너리티 리포트’ 17년
베트남 민간인 피해 파헤쳐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 ‘속죄’ 도
“힘있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언론들은 많은데, 약자를 위한 신문도 하나는 있어야지요. 약자를 위한 언론 〈한겨레〉가 더 튼튼해져야 언론의 균형이 맞는 것 아닙니까.”(김연식)
발전기금을 내주신 분들이 남긴 ‘한겨레에 남기는 한마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공통된 글귀는 위와 같이 “약자의 소리를 대변하는 언론”과 “초심으로”라는 당부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언론 〈한겨레〉는 창간 이후 17년간 줄곧 권력을 감시하고 각종 권력의 부당한 행사와 횡포를 고발하는 구실을 수행해 왔다. 성역 없는 권력 감시가 〈한겨레〉 보도의 한 축이었다면 또다른 축은 사회적 약자의 현실을 알려 사회문제화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한겨레신문의 모든 주주들은 결코 돈이 남아돌아 투자한 것이 아니요, 신문다운 신문, 진실로 국민 대중의 처지를 대변해 주는 참된 신문을 갈망한 나머지 없는 호주머닛돈을 투자한 어려운 시민층이므로 이 신문은 개인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래의 모든 신문과는 달리 오로지 국민 대중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는 그런 뜻에서 참된 ‘국민신문’임을 자임한다.”
1988년 5월15일 창간호 1면에 실린 〈한겨레〉 창간사는 한겨레가 국민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천명하고 있다.
나머지 언론들이 절대 지분을 소유한 사주 일가와 그 우호집단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거나 신문사 탄생과 운영의 배경이 된 재벌이나 종교단체의 그늘 아래 있는 것과 달리, 〈한겨레〉는 창간기금을 모아준 국민 대중과 민주화 염원 세력이 탄생 배경이자 존재의 근거다.
6만2천 국민주주들의 참여가 낳은 한겨레의 특성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도로 나타났다. 한겨레는 창간 초기부터 기존 언론이 주목하지 않던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의 현실에 주목했다.
창간 직후인 88년 7월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수은중독으로 두달 만에 숨진 15살 문송면군과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직업병’ 집단발병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원진레이온 공장의 폐쇄와 1천여명에 이르는 이들 피해자를 위한 병원 건립의 기틀이 되었다. 도시빈민의 열악한 주거를 비롯해 한 평 속의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혀 하루를 보내는 복권판매상이나 매표원들의 현실도 조명했다. 한겨레신문사는 다른 신문사의 사회부에 해당하는 조직을 ‘민권사회부’로 운영해 오기도 했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사회적 삶이 복잡해지면서 한겨레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지평도 자연히 확대되었다. 힘있는 사람들에 의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많은 소수자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한겨레는 이들 소수자의 편에서 인간으로서의 행복추구권과 기본권을 옹호하는 보도를 했다. 이런 보도는 신문과 함께 시사주간지 〈한겨레21〉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한겨레21〉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하기 위해 ‘마이너리티’라는 고정지면을 만들었다. 이 코너에서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혼혈인들의 삶, 특혜의 사슬에 묶인 병역특례 요원들의 실상, 상대적 불이익 속의 여자 박사들, 술 강권하는 사회 속 술 못마시는 사람, 저임금에 시달리는 영화 스태프, 이중의 어려움에 처한 장애인 비만 등 우리 사회 곳곳의 크고작은 차별의 현실을 알렸다. 그중에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한겨레21의 본격 문제제기와 당사자들의 잇따른 ‘병역거부 선언’으로 인해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둘러싸고 진지한 논의를 벌였고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 입법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근래에는 종교재단 소속 학교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해 단식하고 투쟁한 강의석군을 인권 차원에서 집중보도한 바 있다. 한겨레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피해를 정면으로 다뤄, 사회적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겨레〉가 불법체류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게 혹독한 노동을 시키며 임금을 주지 않고 산업재해를 입어도 나몰라라 하는 ‘뻔뻔한 한국인의 자화상’을 고발하고,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피해를 당사자들의 고백을 통해 보도하자 일부에서는 “〈한겨레〉는 국익에 반하는 언론인가”라며 강한 반발을 하기도 했다. 2000년 6월27일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소속 2400여명은 한겨레 보도에 항의해 한겨레신문사에 몰려와 차량과 집기를 부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적 이미지를 실추시킨다는 일각의 비난을 무릅쓰고 진행된 이들 보도는 한국 사회가 이주노동자들을 한국에 보낸 아시아 각국 및 전쟁피해국인 베트남과 화해하고 협력적 관계를 갖도록 하는 데 긍정적 기여를 했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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