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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5 16:50 수정 : 2005.07.25 19:54

<중앙일보>는 25일자 1면 사설에서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 와 관련해 ‘다시 한번 뼈를 깎는 자기반성 하겠습니다’는 사설을 내보냈다. 중앙일보 PDF.


베끼기·짜깁기·외면하기…미림팀장 발언 인용 제각각

공범 세 명이 따로 따로 조사를 받는다. 셋 다 범행을 부인하면 다같이 가장 낮은 형량을 받을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자백을 하면 자백하지 않은 나머지 공범은 최고형량을 받는 대신, 자백한 사람은 그보다 낮은 형량을 받는다. 물론 자백한 사람도 셋 다 범행을 부인할 때보다는 높은 형량을 받는다. 하지만 다른 공범이 자신보다 먼저 자백한다면 가만 앉아서 가장 높은 형량을 받게 된다. 그래서 공범 셋 다 자백할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공범들은 모두 최고형량을 받는다. 이른바 ‘죄수의 딜레마’다.

죄수가 한 명 있다. 공범 두 명은 숨어 있다. 이 죄수는 공범을 대면 형을 감면받거나 면제받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범의 죄를 증언한다. 검찰은 이 죄수의 범죄도 입증하고, 공범들도 일망타진한다. 이른바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도)’이다. 미국영화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이 제도가 없다. 얼마전 검찰이 사법개혁위원회에 이 제도를 도입하라고 요구한 적은 있다.

중앙일보, 방어에서 공격으로…“조선·동아도 다친다”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 사태를 다룬 25일치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보도는 ‘조·중·동’이라는 낯익은 묶음을 무색하게 한다. 전날 밤 <에스비에스>의 ‘미림팀장’ ㄱ아무개씨의 인터뷰 보도에 대한 세 신문 보도는 제각각이다. 이 보도를 가장 의욕적으로 인용 보도한 신문은, 그동안 이 사태를 가장 소극적으로 다뤄온 중앙일보였다. 극적인 반전이다.

중앙일보는 이날 1면에 사설을 싣는 파격을 시도했다. 홍석현 전 사장이 정치적 악습에 관련된 것으로 비친 것에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과 독자 앞에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앙은 ‘입 열면 다칠 언론사 많다’(1면 머릿기사), ‘조선·동아 지금 제정신 아니야…역겨워’(3면) 등의 제목을 단 기사를 통해 조선·동아 등 경쟁 언론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중앙일보는 조선일보가 도청테이프 문제를 처음 치고나온 뒤 파문이 커져가는데도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추고 “도청 진상 규명이 먼저”라며 ‘차별화’된 보도 태도를 보였다. 홍석현 주미대사가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97년 대선자금 지원을 논의하고, 이를 직접 정치권에 전달했다는 테이프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법원의 방송금지가처분 결정을 대며 불법 도청한 테이프 내용을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반성의 물마루 너머는 곧바로 공격이었다. “중앙일보는 물론 다른 언론사 임원들도 도청했으며, 입 열면 안 다칠 언론사 없다”는 미림팀장의 말을 에스비에스 보도를 그대로 인용해 1면과 3면에 펼쳤다. 에스비에스의 보도는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앙일보는 직접 하기에는 차마 낯뜨거운 얘기를 인용보도 방식으로 돌려서 했다.

조선일보 “정치권 각성하라”…자기 얘기는 쏙 빼

하지만 메시지는 정확했다. 중앙은 ㄱ씨의 말을 빌려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며 “자기들은 마치 정도를 걸어온 것처럼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역겨웠다”고 보도했다. 또 “중앙일보의 도덕성을 연일 공격하는 다른 언론사는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라는 말도 그대로 전했다. ㄱ씨의 말을 인용했으나, 주어를 ㄱ씨에서 중앙일보로 바꿨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듯하다. 자기만 죽지는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25일 1면에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 와 관련해 전 안기부 미림팀장 공아무개씨의 말을 인용해 ‘정치인 중 돈 안받은 사람 없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조선일보 PDF.
에스비에스 보도에 대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보도는 ‘부분 인용’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짜깁기’라고 한다. 두 신문은 미림팀장의 발언 가운데 “정치인 중 돈 안받은 사람은 없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헛기침만 하는 정치권을 겨눠 화살을 날리면서도,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거나 “자기들은 마치 정도를 걸어온 것처럼 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역겨웠다”는 내용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같은 인용보도라도 입맛은 제각각이다.

조선일보는 ‘X파일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사설에서 “(국민들은) 유력인사들의 식사자리까지 도청한 정권, 여야를 넘나들며 거액의 정치자금을 뿌린 재벌, 국민들 앞에선 깨끗한 정치를 다짐해 놓고, 무대 뒤 자금전달 창구역을 하면서 정보까지 넘겨준 언론사주의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 지도층의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허탈해하고 있다”며 정치권과 홍 전 사장을 싸잡아 비난했다. 한때 ‘밤의 대통령’을 자임했던 자신의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동아일보는 방송뉴스 안봤나?…미림팀장 발언 보도 안해

대부분 언론이 미림팀장의 발언을 주요기사로 처리한 반면 동아일보는 기사에서 ㄱ씨의 발언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지면 곳곳에서 홍석현 대사의 부적격성을 강조하고, 이번 일을 삼성과 정치권의 고해성사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삼성과 이·김 후보 모두 고해해야’라는 사설에서 “도청 녹취록 보도대로 1997년 대선 당시 삼성과 이회창, 김대중 후보 간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사실이라면 당사자들은 고백성사를 통해 전말을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하는 것이 옳다”며 “그것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서나, 당략을 떠나 대선에 출마했던 정치 지도자로서나 마땅히 져야 할 도덕적 책무일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 도청테이프에는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씨의 당선을 위해 뛰었던 언론사가 중앙일보만이 아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대선이 박빙의 승부로 치닫던 97년 10월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은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에게 “다른 언론사에서 DJ의 약점인 건강문제를 강도높게 취재하고 있으며, 곧 기사화할 것”이라는 정보를 내놓고 “이 언론사의 최고위층은 누가 되든 김대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등장한 언론사는 다음달 발행한 잡지에 김대중 후보의 처방 내역을 분석해 “당뇨와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을 앓고 있다”고 보도했다.

안기부의 불법도청이 정·재계는 물론 언론사를 대상으로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설이 나돌고 있다. 다른 신문과 방송의 ‘엑스파일’이라고 해서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는 상황이다. 조선·동아를 비롯해 불법 도청테이프 문제를 집중 보도하고 있는 방송사들이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도청 테이프가 꼭 새로 나와야만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짐작이 가기로는 25일치 아침 신문들에서 ‘죄수의 딜레마’와 ‘플리바게닝’의 복잡한 조합이 나타난 사정도 마찬가지다. 한국 언론이 ‘X파일’이라는 냄비가 부글부글 끓도록 군불을 지피고 있지만, 자칫하다간 냄비 속 쌀은 밥이 되지 못하고 재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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