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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5 18:46 수정 : 2005.07.15 18:53

어느날 감옥창에 햇살이 들어왔어, 한겨레 창간호

‘민족의 화해에 기여하는 신문…’ 튀어나올 듯한 굵은글씨에 심장이 몹시 떨렸지. 단식퉂뱅을 했어, 한겨레 넣어달라고. 며칠뒤 검은 매직으로 가린 신문이 배달됐어. 그걸로 세상을 봤지. 89년, 30년 옥살이 끝내고 지인들이 돈을 모아 줬지. 꼭 필요한 데 쓰라기에 한겨레에 냈어. 한가지 소망이라면? 북에 있는 58년생 막둥이랑 한겨레 같이 볼 날 왔으면.

장기수 출신 창간독자 정순택(85)씨가 6월 말 제2 창간기금 50만원을 기탁했다. 정씨는 1989년 12월 가석방된 직후 〈한겨레〉 발전기금으로 50만원을 낸 바 있다. 그 돈은 꼬박 30년을 ‘옥살이’하고 나온 그에게 친척·친구들이 “꼭 필요한 곳에 쓰라”며 모아준 것이었다. 그에게 당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한겨레〉의 발전이었던 셈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요즘 다른 장기수 두분과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외식을 거의 안한다.” 발전기금 50만원은 이렇게 아끼고 모은 돈이다. 그러나 정씨는 이번에도 “꼭 필요한 곳에 돈을 쓴다”고 밝힌다.

그의 〈한겨레〉 사랑의 출발점은 1988년 5월15일 창간호다. 당시 그의 감방 창문으로 신문 한 조각이 들어왔다. 필시, 교도관 중 누군가가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넣어주었을 터였다. 펼쳐본 종이엔 ‘한겨레신문’ ‘창간사’ ‘국민 대변하는 참된 신문 다짐’이라는 굵은 글씨가 튀어나올 듯 박혀 있었다. 그는 신문조각을 들고 얼른 ‘뼁기통’(감방 옆에 붙은 작은 변소)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신문을 보는 것은 독방에 갇혀야 할 만큼 큰 위반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떨리는 감격으로 이 창간호를 만들었다”는 송건호 〈한겨레〉 발행인의 창간사를 읽으면서 그의 마음도 심하게 떨렸다. ‘권력으로부터 독립되고,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신문, 그리고 민족의 화해에 기여하는 신문 ….’ 그가 1958년 남쪽으로 내려와 30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는 것도 민족분단이라는 질곡 때문었다. “이 신문이 분단으로 고통받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돼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신문을 꼭 구독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바뀌었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창간호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88년 10월 재소자에게도 신문 구독이 허가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가 있던 전주교도소는 〈한겨레〉만큼은 구독을 못하게 했다. 정씨는 “법무부의 방침이냐”며 이틀을 단식했고, 마침내 “소장의 독자적 지침이었다”는 대답과 함께 〈한겨레〉 구독이 허가됐다. 검은 매직이 지면의 상당부분을 가렸지만, 그때부터 〈한겨레〉는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이었고, 창이었다.

“돈 많은 신문들이 가진 높은 빌딩에 비하면 한겨레는 오막살이잖아. 그런데도 한겨레가 내는 목소리는 부자신문들보다 훨씬 쩌렁쩌렁 크게 울렸잖아. 그런 목소리 덕에 남북화해가 이만큼 오게 된 거지!”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그가 북쪽을 택한 것이 1949년, 그리고 1958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올 때 막내둥이 넷째는 난 지 겨우 석 달짜리였다. 그의 남은 소원은 민족화해가 더 진전돼, 너무 어려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막내 아들과 〈한겨레〉를 함께 보는 것이다.

“〈한겨레〉가 북쪽 소식을 더 많이 실어줬으면 좋겠어. 같은 민족으로서 애정을 갖고서 말이야!”

그는 남북관계와 민족화해가 많이 진전됐지만, 앞으로 헤쳐나갈 길도 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한겨레〉가 1988년 감옥에 갇힌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이 돼주었듯이, ‘분단’이라는 틀에 갇힌 민족에게 화해의 새 세상을 보여줄 창이 도어줄 것을 믿는다.

글 김보근, 사진 이정아 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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