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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5 17:46 수정 : 2005.07.15 17:50

한겨레에 ‘시주’하러 온 조계종 기획실장 법안스님

“한겨레신문사에 빚 갚으러 왔습니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인 법안 스님이 7월8일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왔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을 비롯해 전국 주요 사찰의 주지와 회주 등 15명의 스님이 〈한겨레〉 제2 창간 발전기금에 동참하겠다며 법안 스님이 대표로 신문사를 찾은 것이다. 스님들은 주로 사찰을 대표해서 시주를 받아 왔는데, 처지를 바꾸어 스님들이 한겨레에 시주를 하러 온 셈이라고 법안 스님은 덧붙였다.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을 비롯해 강화 보문사 성월, 합천 해인사 현응, 순천 송광사 영조, 영천 은해사 법타, 남양주 봉선사 철안, 서울 노원구 무진법장사 퇴휴, 양양 낙산사 정념, 갓바위 선본사 정묵, 조계사 원담, 북한산 도선사 혜자, 부산 범어사 대성, 북한산 금선사 법안, 대구 은적사 허운 스님 등 주지 스님 열네 분과 파주 보광사 회주 효림 스님이 ‘한겨레 제2 창간’에 기금으로 참여했다. 큰 사찰의 주지 스님들이지만 스님들의 참여는 절을 대표한 것이 아니라, 각 스님들의 개인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불교 자정 큰힘 보탠
11년전 빚 갚겠다”
스님 열다섯분 정성 모아

법안 스님은 “조계종이 한겨레신문사와 맺은 인연은 깊고도 깊습니다”라며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의 종단을 개혁하고자 할 때 그 어느 곳보다 큰 힘이 되어준 곳이 〈한겨레〉였습니다”라고 ‘시주’의 배경을 설명했다.

절집에서는 좋은 마음을 품고 섬기는 것을 보시라고 하고 이를 베푸는 이를 시주자라고 부르는데, 시주자보다 더 큰 일로 여겨지는 게 상대를 감화시켜 보시와 시주에 이르게 하는 화주의 노릇이다. 법안 스님은 ‘발전기금으로 한겨레 빚갚기’에 화주 노릇을 한 셈이다. 때문에 이번 기금에는 법안 스님과의 개인적 인연이 깊은 스님들이 주로 참여했다.

조계종과 한겨레신문사의 ‘인연’은 1994년 조계종 폭력사태로 거슬러올라간다. 법안 스님은 “94년 종단 개혁운동 때 우리 불자들은 깊은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스님들은 처자식의 인연도 맺지 않고 오로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로, 무엇 하나를 옳다고 판단하면 그에 매진합니다. 수행자가 가장 당당해야 하는데 당시 상황은 수행자들을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법안 스님은 또 “뜻있는 승려들이 불법을 받들고 부처님을 모시는 종단다운 종단으로 바꿔내자는 개혁운동을 펼치는 데 다른 곳에서는 도와주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이때 〈한겨레〉가 큰 도움을 준 것을 지금까지 많은 불자들은 잊지 못하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법안 스님은 “한겨레는 늘 역사의 지평을 여는 횃불과 같다고 봅니다”라며 “그 횃불을 만드는 것은 국민이니, 국민의 마음을 횃불로 알고 초심을 잃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한겨레에 ‘화두 겸 발원’을 남겼다.

글 구본권, 사진 황석주 기자 starry9@hani.co.kr


종단 폭력배 동원 ‘한겨레 특종’으로 진실 밝혀

94년 조계종 폭력사태란?

1994년 4월11일 오후 경찰의 저지를 뚫고 조계사 불교회관으로 들어가려던 개혁파 승려가 전경과 몸싸움 끝에 실신하자 스님과 신도들이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1994년 3월 서의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 3선 연임을 밀어붙이자,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를 주축으로 한 불교계 개혁세력이 반대에 나서고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3월29일 새벽 종단 개혁을 요구하며 조계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범종추 쪽 스님들과 불자들이 조직폭력배들에게 무차별로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부와 경찰은 조직적인 폭력배 동원으로 인한 조계사내 충돌을 불교계 내분으로 여겨 간여하지 않았다. 경찰은 오히려 이날 오후 공권력을 동원해 농성 중이던 승려와 불자 476명을 연행함으로써 이튿날 열린 중앙종회에서 서의현 총무원장 쪽의 3선 연임이 가능해지도록 했다.

정치권력의 비호 아래 3선 연임을 꾀하던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의 조계종을 비판적으로 보도해오던 〈한겨레〉는 3월29일 조계종 폭력사태가 총무원 쪽의 치밀한 사전계획 아래 진행된 것임을 폭로했다. 〈한겨레〉는 당시 조계사 부근 호텔과 여관을 모두 뒤져 서 원장 쪽이 돈을 대 폭력배를 계획적으로 동원한 사실을 밝혀내 보도했다.

〈한겨레〉의 결정적 보도로 서 원장은 여론과 불교계 일반의 질타를 받고 궁지에 처해 결국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다. 범종추가 앞장선 총무원장 불신임은 이후 원로스님들마저 개혁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불교계의 대대적인 개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조계종은 불교의 자주성을 포기한 채 권력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이를 방패막이로 교계에 전권을 행사하던 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상당 부분 자체 정화와 과거청산에 성공했다는 안팎의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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