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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4 19:32 수정 : 2005.07.14 21:56

파리 시내 한 신문잡지 판매대에서 젊은이들이 신문을 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김보협 기자

[접속, 뉴 미디어] ⑥ 권위지는 무풍지대? - 서유럽


인터넷 보급률 낮고 독자 충성도 높아
“포털에 헐값으로 기사 안준다” 자신감
온라인 유료회원 많지만 “언젠가는…” 경고도

6월 중순, 영국 권위지 <인디펜던트>에는 ‘미디어시대의 종말-플리트가와의 고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로이터>가 본사를 런던 동쪽 도클랜즈 지역으로 옮기면서 영국 미디어산업의 심장이었던 ‘플리트가’의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인디펜던트가 붙인 제목은 격동하는 뉴미디어의 현장을 보고 싶어 하는 한국 기자의 상상력을 적잖이 자극했다. 주요 신문들이 줄줄이 플리트가를 뜬 데는 위기를 맞은 전통 미디어의 속사정이 숨어 있을 법했다.

하지만 한국의 신문업계가 처한 어려움에 견줘, 영국과 프랑스는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출퇴근 시간이면 런던과 파리 시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지하철의 역 주변 가판대는 신문을 집어드는 독자들로 붐볐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2000년 100만부에서 올해 91만부로, 프랑스의 <르몽드>는 같은 시기 35만부에서 33만부로 발행부수가 떨어지는 등 최근 몇해 동안 판매부수가 조금씩 줄고 있지만, 권위지와 대중지 그리고 그 중간급 신문들이 수만부에서 수백만부까지 팔리면서 탄탄한 지위를 유지한다.

뉴미디어의 강력한 도전이 없는 것도 이들을 한결 느긋하게 한다. 프랑스는 컴퓨터의 가구 보급률이 50% 이하이고 초고속통신망 이용률(15% 가량)도 낮은 편이다. 영국도 인터넷 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 보니 이곳의 주요 권위지에서는, 편집국 안에 방송시설을 갖춰놓고 동영상 서비스를 시작한 미국 신문이나, 공격적 마케팅과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미디어 강국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는 북유럽 신문들 같은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다.

40년 남짓 기자로 일하다 은퇴한 뒤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홍보를 맡고 있는 조지 뉴키-버든은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뉴미디어’가 등장했을 때도 신문의 위기라고 했지만 이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성장했다”며 “앞으로 몇 년 사이에 무엇이 나올지 몰라도, 신문과 인터넷 같은 뉴미디어의 관계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유럽 권위지들의 이런 모습은 탄탄한 권위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영향이기도 하다. 앤절라 필립스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교수(언론학)는 “영국도 무가지와 인터넷의 영향이 있지만, 신문의 브랜드 가치에 대한 독자들의 충성도는 여전히 높다”며 “이라크 전쟁 발발 당시 인터넷 접속률이 폭등했지만 네티즌들이 찾아간 곳은 <비비시>나 <가디언> 같은 권위있는 매체들의 사이트였다”고 덧붙였다.

오프라인의 권위는 온라인에서도 존중받고 있다. 구글과 야후 등 포털사이트가 뉴스를 서비스하지만, 통신기사를 속보로 걸어두는 수준을 넘지 않는다. 르몽드나 가디언이 그들의 콘텐츠를 헐값으로 포털에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온라인에서 르몽드나 가디언을 보려면 꼬박꼬박 해당 사이트에 찾아가야 하고, 일정 시기가 지난 기사는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르몽드의 온라인신문인 <르몽드 앵테락티프>는 6만명의 유료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관점과 깊이가 있는 ‘뷰스페이퍼(Viewspaper)’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덕분이다.


이처럼 서유럽 전통 미디어들에게 뉴미디어의 공세는 가벼운 감기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 신문과 비교하면 자본이라는 기초체력이 튼튼하고 전통과 권위라는 맷집으로 단련돼 있다. 최근 스페인 <엘파이스>의 자본 지원을 받고 경영위기를 넘긴 르몽드도 위기의 본질은 뉴미디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크리스토프 자퀴비진 르몽드 기자협회 부회장은 “우리가 어려움을 겪은 것은 독특한 소유구조에서 오는 자본의 취약함 때문”이라며 “권위는 여전히 우리의 최대 자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유럽 권위지도 영원히 뉴미디어의 무풍지대가 될 수는 없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인디펜던트>의 리처드 위디 글로벌 디렉터는 인터뷰에 앞서 영국 미디어 전문지인 <프레스 가제트>의 최근 기사를 내밀었다. 조만간 구글과 아마존 등 인터넷 대기업들이 뉴스 서비스를 시작하고, 네티즌들이 ‘사실’을 입력하면 기사가 만들어져 나오는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이들이 만든 기사와 동영상들이 ‘전자종이’를 통해 자유롭게 유통되는, 그래서 2014년께는 기자의 취재수첩 같은 것들이 박물관에 처박히게 된다는 가상 시나리오를 다룬 기사였다.

리처드 위디는 “기존 미디어들이 디지털 기술을 흡수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미래에 구글 같은 검색엔진이 미디어그룹 인수·합병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며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외길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기존 미디어들이 여러 갈래의 교차로에 서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디지털 혁명’이 더디게 오고, 이에 신중하게 대처하더라도, 서유럽 권위지들이 환경 변화에 제때 적응하거나 진화하지 못하면 빙하기 공룡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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