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23 17:00
수정 : 2005.06.23 17:00
‘딥 스로트’(깊은 목구멍)로만 알려진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의 취재원이 33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 익명의 장막 뒤에 숨어있던 인사는 연방수사국의 제2인자였던 마크 펠트로 밝혀졌다. 그 시절 미국에서는 극장용 도색영화 ‘딥 스로트’가 단연 화제였다. 음란물로 피소된 이 영화의 상영을 막으려고 경찰은 극장봉쇄에 나섰고,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은 뜨거웠다. 이 외설스러운 단어는 영화제목보다도 익명의 내부 고발자로 더 유명해졌다. 보통명사로 자리잡을 만큼 말이다.
1972년 6월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세기적 특종이다. 이 보도가 빌미가 되어 2년 뒤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사임하고 말았다. 세계 최강국의 최고의 선출된 권력이 일개 신문에 의해 축출된 셈이다. 일련의 보도는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키는 지구적 뉴스였다. 두 풋내기 취재기자는 일약 세계적 명사로 떠올랐다. 그런데 ‘딥 스로트’는 무대 뒤에서 입을 다물고 이름 없는 긴 세월을 보냈다.
그 즈음 이 나라에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음모가 책동 중이었다. ‘10월 유신’을 획책하는 일당으로서는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보도지침에 따라 죽을 기사가 살고, 살아야 할 기사가 죽는 판이었다. 이 사건은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의미를 지녀 권력의 비위를 건들기 십상이었다.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보도통제에 눌린 기자들이 무력감에 빠졌다. 그래도 뜻 있는 기자들이 있어 편집국에서 기사삭제에 항의하는 밤샘 농성이 종종 벌어졌다. 자유언론실천운동의 불을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취재활동은 언론사에 기리 남을 탐사보도의 금자탑이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우드스타인’은 언론학 교과서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다. 거대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려면 때로는 생명의 위협도 각오해야 한다.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의 용기와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의 결단력이 없었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 닉슨은 워싱턴 포스트의 TV방송권을 뺐겠다고 위협했고, 재정몰락을 꾀하는 음모 탓에 주가가 폭락하기도 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절대권력에 대한 도전이다. 닉슨은 바로 권부 깊숙이 숨어있던 ‘딥 스로트’의 혓바닥에 운명을 맡긴 꼴이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었다. 편집국장 브래들리도 닉슨이 사임한 뒤에야 알았다. 믿을 만한 정보원이라는 것만 알고 말이다. 사운을 걸어야 했던 사주 그레이엄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도 궁금했던지 한번은 파티에서 만난 ‘우드스타인’에게 물었다. 그들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손가락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결국 그의 정체를 모르고 유명을 달리했다.
편집권은 권력뿐만 아니라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이뤄져야 보장된다. 자본에 아첨하지 않고는 자리조차 보존하기 어려운 이 나라 현실에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권력과 결탁한 대가로 관계-정계로 나가 출세를 보장받고 싶어한다. 이런 풍토에서 내부 고발자가 나오더라도 신분을 얼마나 보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권력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정보공개법은 허울뿐이니 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능력과 상관없이 편집국장의 수명이 날로 단명하고 있다. 브래들리는 23년간 편집국장에 봉직하며 워싱턴 포스트의 성가를 날렸고, 그래서 세계적인 신문으로서 반석을 굳혔다. 서른 세 번의 성상은 ‘우드스타인’을 백발의 노안으로 바꿔놓았다. 미숙해 보이던 동안은 간데 없지만 아직도 왕성하게 현장을 누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그 즈음 활동하던 기자들이 거의 현직을 떠났다. 10년 뒤쯤 그들을 귀감 삼아 언론계에 뛰어든 이들마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언론계에 세차게 부는 연소화 바람이 논설위원도 40대로 낮추고 있다. 수지악화와 고용불안이 경륜도 실력도 마다하고 말이다. 한국언론의 위기를 말하는 대목이다.
김영호/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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