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17 19:51
수정 : 2005.03.17 19:51
사실, ‘사명’이란 말은 아무데나 사용하기에는 좀 부담스럽다. 일상적인 ‘책임’과 ‘의무’보다 더 넓은 외연을 갖고 있어 깊은 사념과 외적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부문에서 주로 사용한다. 이를 언론의 영역에 사용하면서 거리낌이 없는 것은 언론의 책임과 의무가 종교에 버금갈 정도로 지대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사명. 다양한 교과서적인 정의가 나오겠지만 이를 단순화하면 결국 ‘삶의 질’에 대한 문제다. 새삼 언론의 사명을 들먹이는 것은 언론이 ‘삶의 질’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 뭐 별건가? 내가 사는 이 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긍심이 아닌가. 살 만한 곳이 못된다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심어줘야 하지 않는가. 이를 물질적인 풍요에만 국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의’이고 ‘심리적 박탈감’이다. 이는 존재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해 본 사람한테는 목숨과 다름없다. 이 정의와 박탈감 영역에의 자발적 참여가 시민운동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가장 큰 보상은 보람이다. 그래서 민망할 수준의 활동비지만 이 땅에 역사와 의식의 진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닌가.
암울한 때에 오히려 배를 불리고 불법적인 경품으로 언론 시장을 황폐화한 족벌신문들에게 자발적인 참여는 이해의 한계이고, 보람이라는 보상은 이해 불능인 모양이다. 그래서인가 양심적인 시민단체의 활동은 늘 비판의 대상이다. 그들의 논조는 악의적인 왜곡을 넘어 저주 수준이다. 3월11일치 <조선일보> 종합면에 ‘시민단체들, 골리앗이 돼버렸다’는 제목이 올랐다. 어느 단체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을 근거로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시민단체를 “권력에 취해 절제와 도덕의 허리띠마저 흘러내린” 한국 미래의 장애물로 규정한 2월19일치 <조선일보> 강천석 칼럼 ‘화무십일홍’도 마찬가지다. 3월9일치 <조선일보> 정치면에는 시민단체를 ‘입법부’와 같은 반열에 세우려 했다. 이름하여 ‘시민단체부’였다. 입법부의 입안 과정에 참여한 일에 대한 엄연한 왜곡이다. 틈만 나면 친여·친노 세력으로 규정하며 정치적인 색깔을 덧씌웠던 족벌신문의 감정적 반발이 3월14일치 <동아일보> 사설 ‘말없이 울리는 ‘아우성 불패’’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서 시민단체는 ‘법과 제도를 무력화한 범죄집단’으로 매도하며 국민들과 철저하게 격리시킨다.
아직도 ‘의회연설을 위해 입장하는 대통령을 향해 기립해야 하는가 마는가’를 의원총회의 의제로 올리는 한심한 야당은 여전히 키워야 할 정치세력이고 느닷없이 등장한 신보수 운동의 핵심 인물들을 가감 없이 띄워주는 모양새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동안 향유해 온 권력이 과거형이 되었다는 시인 아닌가.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모르고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발악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사회적 미숙아’ 일본 우파들과 다를 바 없다.
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단체가 아직은 시민단체라는 사실을 스스로 보도했지 않은가? 그 이유는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다’는 가치와 그동안 이룩한 삶의 질에 대한에 국민적인 신뢰와 기대에 다름 아니다. 당리당략이라는 정치논리와 인맥과 학연, 그리고 뒷거래에 휘둘려온 대한민국의 근간이 시민단체에 의해 재편되는 과정은 엄연히 의식의 진전에 따른 역사 발전이다. 당장, 시민단체에 대한 음해와 왜곡을 집어치우고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동반자적 관계를 가지시라! 싫으면 말고.
이주현 /경기민언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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