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3.03 16:03
수정 : 2005.03.03 16:03
핸드폰이 없는 나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희한한 사람’ 정도로 불리더니 요즘은 ‘이기적 인간’으로 낙인 찍혔다. 주변의 힐책이 따갑다. 그래도 메시지 교환의 속도전에 말려들고 싶지가 않다. 편의적 호출과 즉각적 응답의 신호 체계를 따를 의사가 없다. 내 집 텔레비전이라는 것도 고작 지상파 채널 몇 개만 보여 준다. 식당이나 기차역과 같은 곳에서 접하는 케이블이나 위성 티브이를 두고 보자면, 그렇다고 해서 뭐 그렇게 불편한 것도 아니다. 만만치 않은 제작 노하우를 축적한 지상파 티브이의 재미를 아직까지는 누구도 따라잡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유감이 있다면, 지상파 방송사들이 씨름이나 배구는 고집스레 중계하면서 훨씬 궁금한 프로 농구는 희한하게 몽땅 딴 데로 빼돌려버린 점이다. 스포츠 뉴스를 볼 때마다 이등 시민의 비애가 절실하다. 원하면 스카이라이프를 신청하라는 건가? 보편적 서비스의 정신과 한참 거리 먼, 위성과 겹치기 출연한 지상파 방송사들의 노골적 상술이 불쾌하다. 공적인 책임의 명백한 유기가 아닌가? 아무튼 ‘기술 발전’이라는 게 반드시 평온한 삶, 공평한 사회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개인적 신념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느리게 간다.
‘다매체, 다채널’이라는 상투적 언어가 다양하고 행복한 방송문화 현실로 직결되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꿈의 매체’라는 등의 온갖 수식어는 장사꾼이 우리를 현혹해 물건을 팔려는 선전 광고문에 불과하다. 판타지고 환상이며, 이데올로기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끊임없이 새로운 하드웨어 상품을 시장에 내놓고 판매를 부추김으로써 이윤을 축적하려는 후기자본주의시대 거대 자본의 욕망이다. 그 축적 논리다. 눈이 핑핑 돌아가는 매체 기술의 속도전 속에서 소프트웨어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래서 불량하고 허접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게임을 주도하는 재벌에게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앞선 텔레비전과 핸드폰, 컴퓨터 기술의 개발이고 그에 따른 시장선점의 효과다. 기술이 상품이고, 상품만이 이윤을 보장한다. 내용이 어떻게 채워질 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본은 문화의 진보를 위해 기술 개발에 투자하지 않는다. 시민의 질 높은 생활을 위해 새로운 매체·정보 하드웨어에 공 들일 정도로 자비롭지 않다.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며, ‘시민’이나 ‘문화’를 들먹이더라도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하다. 난개발과 그 폐해를 은폐할 그럴듯한 구호일 따름이다.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디엠비라는 게 자본의 필요, 시장의 논리에 따라 추진되고 있음은 인터넷을 잠깐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관련 기사의 대부분이 산업적 각도에서 접근한다. 경제 뉴스다. 보통 사람 태반이 디엠비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사실도 디엠비가 삶 즉 문화와 크게 무관한 현상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그래서 지상파 방송사들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토록 호들갑인가? 이념을 초월한 합종연횡,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싸움이 한참이다. <한겨레>가 <에스비에스>와 제휴하는 깜짝쇼가 벌어지고, 또 <교육방송>이 에스비에스와 감정적으로 으르렁댄다. 지상파 디엠비사업자 당첨을 앞두고 난리다. 이념도, 체면도 없다. 소위 언론사로서의 비판의 역할, 견제의 책임도 일찌감치 포기했다. 시민의 시각에서 문제를 따져보는 기사, 칼럼, 사설은 찾아볼 수가 없다. 디엠비를 위한 선전 일색. 자본이 서두르고 ‘전문가’들이 분위기를 잡으면 국가가 전폭 지원에 나서고, 방송위원회는 허겁지겁 허가하는 졸속의 과정에 매체도 적극 동참한다. 자본의 난폭 질주, 그 운전대를 언론사들이 다투어 맡는다. 시민의 의사를 무시한 위험스런 담합구조, 시민의 안녕을 해칠 불안한 운행이다. 그 실패를 신문과 방송은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는 것일까? 사업을 위해 언론을 희생시킨 대가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소외된 시민이 불만의 목소리를 내지를 때, 한겨레는 과연 어떻게 응대할 것인가? 똑같은 침묵으로? 지금처럼 비판정신, 균형감각을 상실해버린 신문과 방송에 ‘언론’이라는 말을 과연 붙일 수 있기는 한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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