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로도 '한국의 인맥' '서민한국사' '민속한국사' '한국인의 조건' '서민의 의식구조' '선비의 의식구조' '서양인의 의식구조' '동양인의 의식구조' '리더십의 한국학' '역사산책' '한국인의 생활구조' '한국인의 정서구조' ' 사랑방이야기' '뭣이 우리를 한국인이게 하는가' '의 환경학' '한국인 이래서 잘산다 이래서 못산다' '한국인의 음식문화' 등 120여 권에 이른다. 그의 칼럼과 저서는 국내외 대학 연구소 등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였으며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즐겨 인용했다. 특히 '이규태 코너' 가운데 북방 문화권 온돌문화에 관한 이야기(1989년 5월28일자)와 평화 지향의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신발 고무신 이야기(1995년 4월23일자)는 2003년 미국 하와이대 한국어 교재에 전재되기도 했다. 고인은 책에 대한 욕심과 왕성한 독서열로 고금의 역사와 동서의 문물을 두루 꿰고 있었으며 독특한 자료 분류법을 창안해 글쓰기 자료를 정리했다.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마지막 박람강기형 기자로 꼽혀왔다. 그는 이름 석자와 함께 김도원 화백의 캐리커처로 얼굴까지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 기자'였지만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소탈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 원칙'은 지인 사이에 소문나 있다. 이희용 기자 heeyong@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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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한국학 박사’ 이규태 기자의 삶과 글 |
2월23일자 조선일보 1면의 '이규태 코너'를 본 독자들은 만 23년간 6천702회를 이어오던 한국 신문사상 최장기 연재기록이 마감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회에 젖었다.
1983년 3월1일 명월관 이야기로 첫회를 시작한 이규태 조선일보 전 논설고문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규태 코너'를 써오다가 이날 '마지막회'임을 선언하며 독자와 고별 인사를 나눈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방우영 명예회장과 방상훈 사장, 캐리커처를 그린 김도원 화백, 교열부원 등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누구보다 독자 여러분께 제 늙은 몸을 구부려 큰절을 올립니다"라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독자들은 그가 건강 사정 때문에 붓을 꺾는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글 말미에 '6천702회 이규태 코너는 투병 중인 필자의 구술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란 글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2월11일 '책찜질 이야기'를 사실상 마지막 글로 장식한 뒤 마지막회를 스포철선에서 엔터테인먼트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사부 씨에게 미리 받아적게 했으며, 죽음을 며칠 앞두고 독자에게 고별 인사를 전한 것이다.
그를 아는 독자들은 '투병 중'이라는 말이 없었다 해도 고인의 지병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것처럼 열정을 불태워온 그의 집필 의지를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규태 전 고문은 수치상의 기록 말고도 우리나라 언론계는 물론 한국학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68년 '개화백경'을 신문 전면에 60회 연재한 데 이어 1975년부터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통해 한국인 심성의 원형을 파헤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밖에도 '6백년 서울' 등 모두 37개의 대형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집필했다.
저서로도 '한국의 인맥' '서민한국사' '민속한국사' '한국인의 조건' '서민의 의식구조' '선비의 의식구조' '서양인의 의식구조' '동양인의 의식구조' '리더십의 한국학' '역사산책' '한국인의 생활구조' '한국인의 정서구조' ' 사랑방이야기' '뭣이 우리를 한국인이게 하는가' '의 환경학' '한국인 이래서 잘산다 이래서 못산다' '한국인의 음식문화' 등 120여 권에 이른다. 그의 칼럼과 저서는 국내외 대학 연구소 등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였으며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즐겨 인용했다. 특히 '이규태 코너' 가운데 북방 문화권 온돌문화에 관한 이야기(1989년 5월28일자)와 평화 지향의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신발 고무신 이야기(1995년 4월23일자)는 2003년 미국 하와이대 한국어 교재에 전재되기도 했다. 고인은 책에 대한 욕심과 왕성한 독서열로 고금의 역사와 동서의 문물을 두루 꿰고 있었으며 독특한 자료 분류법을 창안해 글쓰기 자료를 정리했다.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마지막 박람강기형 기자로 꼽혀왔다. 그는 이름 석자와 함께 김도원 화백의 캐리커처로 얼굴까지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 기자'였지만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소탈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 원칙'은 지인 사이에 소문나 있다. 이희용 기자 heeyong@yna.co.kr (서울=연합뉴스)
저서로도 '한국의 인맥' '서민한국사' '민속한국사' '한국인의 조건' '서민의 의식구조' '선비의 의식구조' '서양인의 의식구조' '동양인의 의식구조' '리더십의 한국학' '역사산책' '한국인의 생활구조' '한국인의 정서구조' ' 사랑방이야기' '뭣이 우리를 한국인이게 하는가' '의 환경학' '한국인 이래서 잘산다 이래서 못산다' '한국인의 음식문화' 등 120여 권에 이른다. 그의 칼럼과 저서는 국내외 대학 연구소 등에서 한국학 자료로 쓰였으며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즐겨 인용했다. 특히 '이규태 코너' 가운데 북방 문화권 온돌문화에 관한 이야기(1989년 5월28일자)와 평화 지향의 성격을 지닌 우리나라 신발 고무신 이야기(1995년 4월23일자)는 2003년 미국 하와이대 한국어 교재에 전재되기도 했다. 고인은 책에 대한 욕심과 왕성한 독서열로 고금의 역사와 동서의 문물을 두루 꿰고 있었으며 독특한 자료 분류법을 창안해 글쓰기 자료를 정리했다.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마지막 박람강기형 기자로 꼽혀왔다. 그는 이름 석자와 함께 김도원 화백의 캐리커처로 얼굴까지 널리 알려진 이른바 '스타 기자'였지만 외모에 신경쓰지 않고 소탈한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삼불 원칙'은 지인 사이에 소문나 있다. 이희용 기자 heeyong@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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