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02 11:01
수정 : 2019.01.02 20:25
유족들 “안전한 진료환경 만들어달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통해 ‘고인의 유지’ 전해
“마음 아픈 사람들이 편견 없이 쉽게 도움받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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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임세원 교수 추모 그림. 한 의사가 고인을 추모하며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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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상담하던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지난달 31일 안타깝게 숨진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유족이 ‘안전한 진료 환경’과 ‘마음 아픈 사람들이 편견 없이 도움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는 뜻을 전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2일 발표한 애도 성명에서 고인의 동생을 통해 전달된 이러한 입장을 밝혔다. 유족 쪽은 ‘고인의 유지’라며 학회 쪽에 다음과 같은 두가지 뜻을 전달했다. 첫째, 안전한 진료 환경을 만들어달라. 둘째,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언제든지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달라. 학회는 “고인의 유지를 이어나가기 위해 앞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 교수는 우울증과 관련한 논문 100여편을 발표하고 한국형 표준 자살예방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정신질환자 치료에 20여년을 힘썼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현 이사장인 권준수 서울대 교수와 차기 이사장인 박용천 한양대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학회 홈페이지에 고인을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안전하고 완전한 진료 환경을 만들기 위해 현황 조사와 정책 논의도 이어나갈 참이다.
이명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이사(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안전한 진료 환경이라는 것은 응급실 등 다른 진료과목과 비슷하겠지만, 치료를 받다가 안 받으면 위험성이 커지는 정신질환자의 특성을 감안해 ‘완전한’ 진료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응급의료법 개정안은, 응급실에서 의료진을 폭행해 숨지게 하면 최고 무기징역까지 가중 처벌받도록 했다. 응급실에서 잇따른 폭행 사건이 발생하자, 처벌 형량을 높인 것이다.
하지만 처벌 강화만으로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이번 사건이 정신질환자에 대한 막연한 오해나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신질환자의 의료 이용의 문턱이 더 낮아져야 하며 정신질환에 대한 적극적인 치료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점에서 이를 어렵게 하는 사회적 인식과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이 매우 시급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명수 홍보이사는 “처벌이 필요한 사람은 확실하게 처벌하고,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확실하게 치료해야 한다”며 “정신질환자의 경우에 병원에 오기 전에는 가족이, 병원에 오면 의료진이 온전히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데 완전한 치료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정신보건의료 시스템이 의사에게 안전한 치료 환경을 보장하지도, 환자에게 지속적 치료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누리꾼들은 고 임세원 교수가 페이스북에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을 퍼나르며,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얼마 전 응급실에서 본 환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신 선생님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긴박감과 피 냄새의 생생함 그리고 참혹함이 주된 느낌이었으나 사실 참혹함이라면 정신과도 만만치 않다. 각자 다른 이유로 자신의 삶의 가장 힘겨운 밑바닥에 처한 사람들이 한가득 입원해 있는 곳이 정신과 입원실이다.
고통은 주관적 경험이기에 모두가 가장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보다 객관적 상황에 처해 있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그중에서도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그분의 삶의 경험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함이 느껴지는,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도대체 왜 이분이 다른 의사들도 많은데 하필 내게 오셨는지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스스로 되뇌면서 그분들과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한다. 이렇게 유달리 기억에 남는 환자들은 퇴원하실 때 내게 편지를 전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20년 동안 받은 편지들을 꼬박꼬박 모아놓은 작은 상자가 어느새 가득 찼다.
그분들은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하시고 나 또한 그분들에게서 삶을 다시 배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의 전공의 선생님들에게 전수되어 더 많은 환자들의 삶을 돕게 될 것이다. 모두 부디 잘 지내시길 기원한다.
이번 주말엔 조금 더 큰, 좀 더 예쁜 상자를 사야겠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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