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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30 06:00 수정 : 2019.09.30 09:20

지난 4월6일 오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천리에서 한 이재민이 마스크를 쓰고 산불로 타버린 집과 일터를 살펴보고 있다. 고성/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탁토론회

산불 몇달 뒤 중금속 농도 급증 등
초기대응 못잖게 사후처리도 중요
한림원 ‘국가 리스크 거버넌스’ 제안
대형 정부사업 ‘사전 위험성 평가’도
대만선 국회 안에 화학안전위 설치

탈원전 논쟁, ‘사실’ 대결로 해결 못해
어떤 가치 추구할 건지 합의가 중요
과학관련 현안 때 즉시 소통 가능한
‘사이언스 미디어센터’ 구축할 필요

지난 4월6일 오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천리에서 한 이재민이 마스크를 쓰고 산불로 타버린 집과 일터를 살펴보고 있다. 고성/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4월4일 오후 7시께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속초, 강릉, 동해로 번진 데다 인제에서도 산불이 나 큰 피해가 발생했다. 2명 사망, 1300여명에 이르는 이재민, 1300여억원의 재산손실 등 인명과 재산피해는 곧바로 집계되고 보고됐다. 하지만 산불에 의한 건강 위해나 환경 영향에 대한 조사·분석은 아직 결과가 나온 바 없다. 사회적 관심도 그만큼 떨어진다. 하지만 산불이 나면 미세먼지 농도가 치솟는 등 보건·환경 피해도 작지 않다. 산불이 발생한 4월4일 강원도 춘천의 미세먼지 농도는 기준치보다 한참 아래였던 데 비해 속초에서는 PM10(지름 10마이크로미터 이하)은 기준치의 2.5배, PM2.5(지름 2.5마이크로미터 이하)는 3배까지 치솟았다. 산불로 다량 발생하는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s)는 발암물질이다. 산불 발생 한달 뒤 측정해보면 대조지역보다 다환방향족탄화수소 농도가 4~24배 상승한다. 2016년 캐나다 앨버타 화재 때 토양의 중금속을 조사해보니 14개월 뒤에나 평상시 수준의 농도로 돌아왔다.

고상백 연세대 의대 교수는 지난 25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기반 국가 리스크 거버넌스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 주제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탁토론회에서 “재난에서 위중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질병부담을 증가시키고 중장기적으로 많은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공중보건학적 문제는 시급한 초기대응보다 국가적 차원의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리투아니아에서는 2002년 산불 발생 수개월 뒤 주변 강물에서 중금속 농도가 많이 증가했으며, 2007년 캘리포니아 산불 잔해에서도 비소·카드뮴·납 등 유해 중금속이 많이 검출된 사례가 보고됐다.

이공래 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는 “사회적 재난과 자연 재해가 빈발하는 현대 사회에서 국가 리스크 거버넌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스크 거버넌스’는 1999년 창립한 국제리스크거버넌스위원회(IRGC)가 제시한 개념으로 “공동체가 직면하는 리스크(위험)를 상호 협력하고 소통해 관리하고 줄여나가는 행위”로 정의된다. 이 전 교수는 국가 리스크 거버넌스를 강화하기 위해 합리성과 과학적 연구 결과에 기초한 리스크 대응을 기획하고 전문가와 정부, 시민사회가 토론과 소통을 통해 상호학습과 계몽으로 성숙한 안전의식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정부와 국회의 리스크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강하고 민주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국회 안에 가칭 국민안전처를 신설할 것을 제안했다. 국민안전처의 임무로는 국회의원의 조사·분석 요구에 대한 회답을 하고 행정부의 위법 또는 제도 개선 사항을 발굴하며 국회의원 연구단체에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 제시됐다. 대만의 경우 국회 안에 화학안전위원회(CSB)를 설치하고 의장인 국립대만대 교수를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한 사례가 있다.

그는 또 종료 뒤 부정적 파급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대규모 정부사업의 경우 예비타당성 분석 제도처럼 사전에 위험성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원국 리스크엔지니어링서비스 기술이사도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제3의 독립기관에 의해 정량적 위험성평가 작업을 진행하고 결과는 공개된 장소에서 발표되고 토론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일 연세대 부총장은 “2012년 구미에서 불산누출사고가 발생한 이래 유사한 사고가 해마다 반복되고 있지만 체계적인 조사와 후속 사고 예방을 위한 정보 공유와 전파 활동이 미비하다”며 “국회 산하에 국가사고조사위원회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지진해일로 시작된 자연재난이 대형 기술재난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일으킨 것처럼 자연재난에 의해 발생하는 기술재난 곧 ‘나테크(Na-tech) 재난’에 대한 관리시스템을 구축할 필요도 제기됐다. 권혁면 연세대 산학협력단 연구교수는 “나테크 재난은 두 재난 영역간 결합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증대돼 더욱 세심한 재난관리 접근방식이 요구된다”며 “기존 재난관리 방식과 달리 위험에 대한 인식부터 대응과 복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만 서강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미국의 1960년대 아동학대 문제와 영국의 1980년대 시험관 아기 논쟁을 사례로 들면서 리스크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측면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탈원전 논쟁은 어떤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에 의거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원전이 가지는 효율과 위험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어떻게 구성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며 “원전 의 객관적 위험이 ‘얼마나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를 상호 논쟁을 통해 합의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리스크 거버넌스는 위험인지가 구성되는 사회적 과정을 이해하고 전문가와 일반 시민의 토론과 논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토론회에서는 광우병 논란, 조류인플루엔자 확산, 메르스사태 등 논쟁적인 과학적 이슈가 등장했을 때 신속하고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언론에 제공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정보가 전파되도록 하기 위한 ‘사이언스미디어센터’를 구축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한민구 한림원 원장은 “한림원이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같은 과학자 집단은 사회적 이슈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사이언스미디어센터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정확한 과학적 사실이 신속하게 전달된다면 리스크 거버넌스 강화에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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