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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6 16:29 수정 : 2005.10.26 17:04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강재섭원내대표가 이해찬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의 본회의 답변 태도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서울=연합뉴스)

[분석] ‘정체성 수호’ 선언후 토론·대정부질문서 여당에 당하는 이유

‘대여 공세’를 선언한 한나라당이 방송 토론이나 대정부 질문에서 형편없이 밀리는 ‘말발’로 고민에 빠졌다.

박근혜 대표는 “국가 정체성 수호”에 ‘올인’을 선언했으나, 정작 강정구 교수 사법처리를 놓고 벌인 방송토론에서 한나라당을 대변해 패널로 나섰던 의원은 근거없는 명예훼손성 발언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한나라당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색깔공세를 펼쳤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이해찬 총리와 천정배 법무장관·정동영 통일장관은 “근거없는 소리”, “유언비어 수준”라며 오히려 한나라당의 추궁을 일축했다.

국가 정체성 수호에 ‘일전불사’를 선언했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꼴이다. 정부와 여당의 여론지지도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한나라당은 왜 ‘호기’를 누리지 못한 채 스스로 궁지에 빠졌는가. 누리꾼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창피하다. 공부 좀 하라. 토론에 나오지 말라”고 꾸짖고 있다. 왜 한나라당이 자못 비장한 자세로 시작한 ‘승부’가 시작부터 꼬이고 있는가?

강재섭 “웰빙정당, 이지고잉하면 안된다”
김충환 의원, 방송 토론서 근거없는 비난성 발언으로 망신

한나라당 강재섭 원내대표가 ‘고백’했다. 강 대표는 24일 당 상임운영위에서 “어느 의원은 우리 보고 ‘웰빙’이라고 하는데 ‘이지고잉’(easy going·쉽게 가면) 하면 안된다”며 “ 치열하게 줄기차게 나가야 한다”고 흐트러진 당의 기강다잡기에 나섰다.

강 대표는 “당 대표가 기자회견하고 강력한 투쟁을 하려고 법사위를 소집했는데, 법사위에 한 두 명이 출석했다고 보도되면 당 살 길이 없다”며 “정보위 등 민감한 위원회에 있으면서 참석률이 낮다거나 정신력이 부족하면 책임지고 교체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또 “상임위, TV 토론, 라디오 토론 등 모든 문제에 강력히 투쟁해야 한다”며 “공부와 연구를 많이 해서 책임있는 발언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대표는 이어 “ TV 출연할 때는 반드시 홍보위원장, 원내대표단에 보고한 뒤 출연해 달라”며 “본인이 아무리 잘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전문가 아니거나, 의도적으로 들러리 세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강 대표가 당 기강을 강조하면서 의원들에게 “공부 좀 하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은 강정구 교수 논란 등을 놓고 벌인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한나라당 토론자들이 크게 밀렸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실제, 김충환 의원은 지난 13일 밤 문화방송 <100분 토론> ‘강정구 사법처리 논란’에 패널로 출연해 “ 강 교수가 6·25 전쟁은 좋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왕건과 같다. 남한 정권은 박테리아 등의 발언을 했다”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김 의원은 “발언의 출처를 밝히겠다”고 했으나 속시원하게 밝히지 못한 채 얼버무려, 누리꾼들로부터 비난만 받았다. 김 의원 홈페이지에는 “공부 좀 해라”, “출처를 밝히라”, “토론에 나오지 말라”는 누리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강 대표의 질책은 준비 없이 방송토론에 나서 근거 없는 발언으로 당의 이미지를 훼손한 김충환 의원을 지칭한 셈이다.

국회 법사위에서 천정배 장관에 핀잔, 역공

<100분 토론>으로 촉발된 한나라당의 ‘토론 콤플렉스’는 천정배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한 국회 법사위의 강 교수 사건 현안보고와 국회 대정부질문으로 이어졌다. 법사위 회의와 대정부 질문은 공중파 방송과 일부 케이블 방송이 생중계해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18일 박근혜 대표의 ‘정체성 구국운동 선언’ 기자회견 뒤 열린 법사위 현안보고에서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언행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해 결국 다수 국민의 인권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가 아니냐”고 질문했다가 천 장관에게 “그런 판단으로 검사를 했다면 법 하고 한참 멀어졌다”고 핀잔을 들었다. 장윤석 의원도 수사지휘권 문제를 언급했다가 선병렬 의원으로부터 “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불가’라며 5·18 사건을 불기소 처분한 담당검사가 장윤석 의원”이라며 “한나라당이 검찰 독립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도리어 공격을 당했다.

이날 법사위에는 한나라당 법사위원 5명 가운데 김성조·주성영 의원이 출석하지 않아, 실제 ‘공격수’는 장윤석·김재경·주호영 의원 등 3명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강 대표가 “당 대표가 기자회견하고 강력한 투쟁을 하려고 법사위를 소집했는데, 법사위에 한 두 명이 출석했다”고 언급한 것이다.

공수가 뒤바뀐 대정부 질문
“빨간색 칠하기로 정책과 무관한 헛발질 때문”

이해찬 국무총리가 25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 의원들의 대정부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강 원내대표가 공부와 연구를 유독 강조한 이유는 25일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을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첫 질의자인 안상수 의원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대연정이 북한의 ‘연방제’ 표현의 사전 희석용이 아니냐는 엉뚱한 주장을 펼쳤다. 안 의원은 “6월 17일 정동영 장관과 김정일이 밀담을 나눈 뒤 6월24일과 7월5일 노 대통령이 대국민 서신을 통해 연정을 발표했다”며 “노 대통령 제안이 지역구도 타파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염두에 둔 숨은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건 아니냐”고 캐물었다.

이어 질의에 나선 이방호 의원은 “북한이 현대아산의 대북사업 전면 백지화를 선언한 것은 현대조선에서 건조 중인 잠수함과 이지스함의 설계도를 건네줄 것을 요구했으나 현대아산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두 의원 모두 “대정부 질문을 근거 없는 색깔론으로 덧칠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답변에 나선 정동영 장관도 “근거 없는 소리”, “유언비어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이해찬 총리도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고 싸운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던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논리로 (참여정부를 향해) 이념과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정말 ‘살면서 별 꼴 다 본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나라당을 맹비난했다. 이 총리는 대부도 땅 문제를 추궁하는 이방호 의원을 향해 “의원님이 품위있게 질문하고 사리에 맞게 질문하면 그렇게 답하겠는데 내용이나 소재가 그렇지 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다”고 면박을 줬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26일 자신이 진행하는 SBS 라디오 방송에 올린 글에서 “강재섭 원내대표는 회의에서 ‘국회의 대정부 질문인지, 정부의 대국회질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며 “옆에서 지켜봐도 공격과 수비가 뒤바뀐 느낌”이라고 비꼬았다. 진씨는 “공격수라면 정책에 관한 예리한 질문으로 총리를 궁지에 몰아넣어야 하는데, 선수(한나라당 의원)들은 땅 투기 의혹 제기, 빨간색 칠하기 등 정책과 무관한 질문으로 헛발질만 하니 총리가 기가 찰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빨갱이·경제 타령’에 지지자도 “화가 치민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민 빼면 할말이 없다”

한나라당은 이 총리의 답변 태도에 “오만의 극치이자 행패”라고 분노했지만, 인터넷 세상에선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이런 비판은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다. 누리꾼들의 불만은 한나라당 홈페이지(www.hannara.or.kr)나 <조선닷컴>의 관련 기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한나라당 게시판의 ‘robins’는 “적당히 질문 시간 때우라고 그 자리를 내준 것이 아닌데, 한나라당 대정부 질문 화가 치민다”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태와 태만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 hermesj’는 “한나라당 지지자로서 국회 대정부 질문을 보면서 개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냉전시대가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국가 정체성을 문제삼는 질문을 하느냐”고 개탄했다.

조선닷컴에서 김찬호는 “TV토론에 나오는 한나라당 논객을 볼 때마다 한심하다 못해 서글퍼질 때가 많다”며 “저런 정당이 해방 후 몇십 년 동안 우리 나라를 어떻게 통치했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조순영은 “한나라당 의원들 짜증난다”며 “논제와 상관없이 들고온 자료(주로 잘못 인용한 신문)만 그대로 읽고, 대화의 초점도 못 맞추고, 처음부터 끝까지 빨갱이타령, 경제도 어려운데 소리만 반복한다”고 지적했다.

윤성석은 “옛날 대선 때도 그랬고, 이번 (강정구 교수) 지휘권 문제도 우리당에서 TV토론을 제안했으나 한나라당은 도망만 다녔다”며 “ “한나라당은 TV토론을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충고했다. 조재성은 “ TV 토론할 때,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국민'이라는 단어 못 쓰게 하면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고 비아냥거렸고, 유경춘은 “공부까지도 바라지 않으니 소설이나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말발 안 먹히는 진짜 이유 “얼토당토 않는 주제 때문”
“국가 정체성 문제로 비약한 박 대표 책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8일 서울 염창동 당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체제 수호를 위한 구국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누리꾼들은 한나라당이 토론에 둔감한 이유를 ‘지역감정과 색깔론 조장을 통해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는 선거필승론에서 찾았다.

김동훈은 “ 한나라당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의원처럼 악랄하게 지역감정 조장하고, ‘우리가 남 이가~’ 한마디하면 상황 끝나는데, 뭐 하러 머리 아프게 공부를 하나”라고 말했다. 김대욱도 “선거할 때만 되면 지역감정 부추기고, 눈물로 읍소하고, 색깔론으로 대충 버무리면 막대기만 꽂아놔도 당선되는데”라며 한나라당 의원들의 태도를 문제삼았다.

그러나 일부 누리꾼들은 한나라당이 ‘말발’이 서지 않는 이유를 공부가 부족하거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나 고리타분한 명분 탓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표가 ‘국가 정체성 수호’에 전면전을 선포하는 등 색깔론을 앞장서 주장해 의원들이 명분을 잃었다는 것이다.

박기현은 “소속 의원들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며 “당의 지도자가 제시한 주제가 얼토당토 않는데, 소속 의원이라고 쉽게 논리를 펼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강 교수 문제를 국가 정체성 문제로 확대 비약한 박근혜 대표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박용희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웅변 실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꺼내야 하니까 토론에서 밀리는 것”이라며 “근본적인 문제를 돌이켜 보기 바란다”고 충고했다.

강명구는 “공부를 해도 명분이 없으니 논리가 따라오지 못하고 그러니 (토론에서) 버벅댈 수밖에 없다”며 “한나라당이 당리 당락과 사리사욕이 아닌 진정으로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박종찬 기자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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