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람들이 나를 귀족이라고 레이블을 붙이기도 하는데, 내가 10살때 아버지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혀 귀족처럼 자라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같은 경험은 우리 사회에서 부역자 가족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까지 설명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그같은 속내와는 상관없이 그의 학연과 집안 배경은 그를 키워준 만큼이나 그에게 짐이 됐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그는 언론사 사주라는 신분에도 불구, 고교 선배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과 연계돼 그의 당선을 위해 삼성그룹의 돈을 선거 자금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선거 자금 문제가 아닌 탈세로 옥고를 치렀으나 이번 '도청 테이프' 파동으로 쓰라린 업보를 다시 안게 됐다. 홍 대사는 옥고를 치른 후 중앙일보를 이념적으로 보수 보다는 중도에 가깝게 이끌기 위해 노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주미 대사를 맡아 신문 경영에서 물러남에 따라 그 이념이 다시 보수화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었다.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은 홍 대사가 과거 잠시 관직에 있었지만 관료 보다는 경영인에 가깝다고 평했다. 또 몸을 사리기 보다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되 효율성과 합법성을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홍 대사는 최근 우연히 일부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엔 사무총장의 꿈을 펼쳤다가 "북핵 문제, 한미 관계 등 대사 본연의 일을 젖혀놓고 개인 야망만 채우려느냐"는 여론의 호된 비난을 받은 후에는 기자들과의 만남을 꺼려왔다. 언론사 사장 출신으로서 기자들에게 '허물없이' 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는 후회도 했다는 말도 들렸다. 홍 대사는 이미 지난 4월 공직자 재산 공개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시절 부인 명의로 부친이 이천 농지를 불법 취득한 사실이 드러난데다, 유엔 사무총장 희망발언, '도청 테이프' 파문 등 부임 5개월 동안 이러저러한 허물로 대사관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홍 대사의 한 측근은 "홍 대사가 도청 테이프 파문 이후 (사의 표명을) 망설이다 베이징 6자 회담이 원만하게 개시되는 시점에 맞춰 사임 결심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워싱턴=연합뉴스)
행정·자치 |
사의표명 홍대사는 누구인가 |
홍석현 주미 대사가 옛 안기부(현 국정원) 불법도청 테이프 파장을 넘기지 못하고 25일 밤(워싱턴 현지시간) 사의를 표명했다.
지난 2월22일 워싱턴에 부임한지 5개월 3일만이다.
북한 핵문제, 한미 동맹 관계 재정립 등 한-미 관계가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중앙일보 사주의 자리를 박차고 주미 대사를 맡았던 홍 대사는 이번 파문으로 불미스럽게 도중 하차함으로써 본인의 꿈이었던 유엔 사무총장 자리도 넘볼 수 없게 됐다.
약관 45세이던 1994년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을 맡은 그는 명문가 출신에 화려한 이력으로 늘 주목받았다.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의 장남이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매형으로 둔 그는 서울대 공과, 스탠퍼드대 산업공학 석사및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세계은행(IBRD) 경제개발연구소 경제 조사역, 재무부 장관 비서관, 대통령비서실 보좌관, 삼성코닝상무와 부사장을 거쳐 중앙일보 사장을 맡았으며,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한국신문협회장, 아시아신문재단(PFA) 한국위원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등 최고의 학벌과 경력을 쌓았다.
홍 대사는 자신의 화려한 배경과 이력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듯 대사 부임후 특파원들과의 첫 간담회에서 다소 뜻밖의 에피소드를 밝히기도 했었다.
부친 홍진기씨가 군사혁명 시절 사형을 선고받았던 사실을 털어 놓은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나를 귀족이라고 레이블을 붙이기도 하는데, 내가 10살때 아버지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혀 귀족처럼 자라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같은 경험은 우리 사회에서 부역자 가족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까지 설명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그같은 속내와는 상관없이 그의 학연과 집안 배경은 그를 키워준 만큼이나 그에게 짐이 됐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그는 언론사 사주라는 신분에도 불구, 고교 선배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과 연계돼 그의 당선을 위해 삼성그룹의 돈을 선거 자금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선거 자금 문제가 아닌 탈세로 옥고를 치렀으나 이번 '도청 테이프' 파동으로 쓰라린 업보를 다시 안게 됐다. 홍 대사는 옥고를 치른 후 중앙일보를 이념적으로 보수 보다는 중도에 가깝게 이끌기 위해 노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주미 대사를 맡아 신문 경영에서 물러남에 따라 그 이념이 다시 보수화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었다.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은 홍 대사가 과거 잠시 관직에 있었지만 관료 보다는 경영인에 가깝다고 평했다. 또 몸을 사리기 보다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되 효율성과 합법성을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홍 대사는 최근 우연히 일부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엔 사무총장의 꿈을 펼쳤다가 "북핵 문제, 한미 관계 등 대사 본연의 일을 젖혀놓고 개인 야망만 채우려느냐"는 여론의 호된 비난을 받은 후에는 기자들과의 만남을 꺼려왔다. 언론사 사장 출신으로서 기자들에게 '허물없이' 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는 후회도 했다는 말도 들렸다. 홍 대사는 이미 지난 4월 공직자 재산 공개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시절 부인 명의로 부친이 이천 농지를 불법 취득한 사실이 드러난데다, 유엔 사무총장 희망발언, '도청 테이프' 파문 등 부임 5개월 동안 이러저러한 허물로 대사관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홍 대사의 한 측근은 "홍 대사가 도청 테이프 파문 이후 (사의 표명을) 망설이다 베이징 6자 회담이 원만하게 개시되는 시점에 맞춰 사임 결심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워싱턴=연합뉴스)
그는 "사람들이 나를 귀족이라고 레이블을 붙이기도 하는데, 내가 10살때 아버지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전혀 귀족처럼 자라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같은 경험은 우리 사회에서 부역자 가족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까지 설명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그같은 속내와는 상관없이 그의 학연과 집안 배경은 그를 키워준 만큼이나 그에게 짐이 됐다.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그는 언론사 사주라는 신분에도 불구, 고교 선배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과 연계돼 그의 당선을 위해 삼성그룹의 돈을 선거 자금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는 선거 자금 문제가 아닌 탈세로 옥고를 치렀으나 이번 '도청 테이프' 파동으로 쓰라린 업보를 다시 안게 됐다. 홍 대사는 옥고를 치른 후 중앙일보를 이념적으로 보수 보다는 중도에 가깝게 이끌기 위해 노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주미 대사를 맡아 신문 경영에서 물러남에 따라 그 이념이 다시 보수화될 것을 우려하기도 했었다. 주미 대사관 관계자들은 홍 대사가 과거 잠시 관직에 있었지만 관료 보다는 경영인에 가깝다고 평했다. 또 몸을 사리기 보다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되 효율성과 합법성을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홍 대사는 최근 우연히 일부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엔 사무총장의 꿈을 펼쳤다가 "북핵 문제, 한미 관계 등 대사 본연의 일을 젖혀놓고 개인 야망만 채우려느냐"는 여론의 호된 비난을 받은 후에는 기자들과의 만남을 꺼려왔다. 언론사 사장 출신으로서 기자들에게 '허물없이' 대했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는 후회도 했다는 말도 들렸다. 홍 대사는 이미 지난 4월 공직자 재산 공개로 청와대 비서실장 보좌관시절 부인 명의로 부친이 이천 농지를 불법 취득한 사실이 드러난데다, 유엔 사무총장 희망발언, '도청 테이프' 파문 등 부임 5개월 동안 이러저러한 허물로 대사관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홍 대사의 한 측근은 "홍 대사가 도청 테이프 파문 이후 (사의 표명을) 망설이다 베이징 6자 회담이 원만하게 개시되는 시점에 맞춰 사임 결심을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워싱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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