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03 19:52
수정 : 2005.01.03 19:52
남아시아 지진 진앙으로부터 40㎞ 떨어진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두 장의 위성 사진은 현기증을 불러온다. 수마트라섬 북쪽 끄트머리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과, 해일이 덮친 뒤 너덜너덜 앙상한 지반만 남은 모습이다. 지상의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지상은 아비규환이다. 아체의 사망자만 8만명에 이르며 40만명 사망설도 나오고 있다. 스리랑카는 해안이 쑥대밭이 되고 폭우까지 덮쳐 비탄의 섬으로 변해버렸다. 한국에 와 있는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들은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다며 발을 구른다. 16년 동안 전쟁터를 돌며 수많은 주검을 접한 전선기자 정문태씨는 타이 푸껫의 흉측하고 처참한 주검에 비하면 전쟁터의 주검은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희망을 말하고 품는 새해다.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그러나 가슴 한켠이 시리다. 여러 나라들과 구호 단체들이 신년 행사를 취소하고 발벗고 나서 구호의 해일을 일으키고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신년사에서 “우리 시대 최악의 자연재해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세계가 힘을 합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유엔과 세계은행이 형식과 절차에 구애받지 않고 피해국들을 돕도록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재빠르게 5억달러 지원을 약속하고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보내기로 했다. 영국에서는 놀라운 시민들의 기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도 나름의 성의를 보이고 있다. 민간 구호단체들이 앞다퉈 달려갔으며, 정부도 처음 500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가 금액을 늘릴 요량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동성에 비춰볼 때 무척이나 굼뜨고 소극적이다. 지원량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나누기 문화에 익숙한 영국인들과, 국제 무대에서 위상을 높이려는 일본 정부와 경쟁할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강건너 불보듯 무심한 게 스스로 놀라울 뿐이다.
우리 정치·재계 지도자들도 새해 고통을 딛고 일어서자고 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말한다. 여기까지다. 지구촌의 더없는 고통에는 눈을 감고 있다. ‘국가와 민족’이 그 고매한 한계다. 생명, 사랑을 받드는 종교 지도자들도 다르지 않다. 남아시아의 비참은 넘쳐나는 새해 ‘말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언론도 피장파장이다. 수만명의 목숨도 의례적인 신년 특집이나 관습적인 정쟁 보도의 문턱을 뛰어넘지 못한다. 난리가 나도 나라 밖은 다른 세계다. 이는 곧 우리의 ‘세계성 부족’을 방증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가슴을 여는 것 또한 사람의 본성이다. 우리는 팔이 안으로 너무 굽었다. 광복 60돌, 국민총생산은 해방 당시에 비해 500배, 상품 교역액은 1만배 가까이 늘었다. 그런데 비싼 과외비 물어가며 세계화를 배웠지만 성적은 반쪽이다. 세계 경제인 되는 것만 공부했고, 세계 시민 과목은 쏙 빼먹었다. 이라크에 군대를 보낸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인류의 대재앙에 무심하면서 세계 평화를 입에 올리기가 더는 어색할 것 같다.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하는 정신을 말한다”고 정수일 교수는 말한다. “자고로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가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을 얼마나 배출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인이 많으면 소국도 강국이 되며, 세계에 대한 기여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정신을 지닌 첫 세계인으로 신라 고승 혜초를 꼽는 정 교수 자신이, 혜초 못지않은 세계인이므로 귀담아 들을 법하다.
머릿속의 국경이 더 진하다. 우리 아닌 것은 남이고, 남이야 어떻든 별 상관 없다는 생각은 가족 이기주의, 지역 이기주의의 뿌리이기도 하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편을 가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세계성 부족 탓이라고 하면 비약일까?
젊은이들로 1천, 아니 1만명의 구호단을 만들어 아체로 스리랑카로 내보내자. 구호 단체나 정부가 삽과 식료품, 의약품 등을 지원해주면 될 것이다. 세계를 품자. 그러면 여의도에서 탁자 붙잡고 허구한 날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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