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세상이 바뀐 걸 모를 때 생기는 일 / 정인환

정인환 ㅣ 베이징 특파원

지난 11일 저녁 7시30분께 대만 타이베이 중심가 중산지구의 국민당 중앙당사 앞에선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제15대 총통과 10대 입법위원을 뽑는 동시 선거가 끝나고 한창 개표가 진행 중인 시점이었다. 당사 앞에 마련된 대형 전광판에선 개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망연했다.

“스왕, 페이창 스왕…(실망이다, 아주 실망스럽다).” 60대로 보이는 여성이 타고 있던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행사장 들머리에선 60~70대 서너명이 승합차 뒷자리에 깃발이며 손팻말 따위를 구겨넣고 있었다. 한 방송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성이 고함을 지르며 밀쳐낸다.

100명 남짓이나 될까? 하나둘 행사장을 떠나면서, 빨간색 간이의자 수십 개가 비었다. 안전을 우려해 출동했던 경찰 경비 병력은 인도에 줄지어 앉아 묵묵히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만에 남부 가오슝에서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한궈위 국민당 총통 후보가 지지자 앞에 섰다. 이미 민진당의 차이잉원 총통과 250만표가량 벌어진 시점이다.

비슷한 시각, 국민당사에서 불과 2㎞ 남짓 떨어진 중정지구의 민진당 중앙당사 일대는 인파로 넘쳐났다. 전광판에 당선이 확정된 후보의 사진이 등장할 때마다 우렁찬 환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당사 앞 도로는 물론 인근 공원까지 꽉 들어찬 사람들로 신이 난 것은 노점상이다. 여기저기 꼬치구이 냄새가 진동했고, 한쪽에선 손수건과 메모지 등 차이 총통 사진이 붙은 기념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차이 총통은 이날 당선 축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혁과 단합의 길을 선택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한다. 지난 4년여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부족했던 부분, 완성하지 못한 개혁을 이뤄내겠다. 평등한 지역 발전과 소득 격차 해소, 주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나가겠다.”

차이 총통의 당선은 예견된 결과였다. 지난달 말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차이 총통과 한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약 30%까지 벌어졌다. 선거를 앞두고 민진당의 우려와 국민당의 기대는 일치했다. 젊은층의 낮은 투표율 속에 숨어 있던 국민당 지지자들이 대거 투표소로 몰리는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00년 이후 지속해서 떨어졌던 대만 투표율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지난 선거보다 8.6%포인트 반등한 74.9%를 기록했다. 차이 총통은 대만 총통 선거 사상 처음으로 득표수 800만 표 고지에 올랐다. ‘숨어 있다’던 국민당 지지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민당은 2016년 선거에 견줘 총통 선거에선 약 170만표(7.6%포인트), 정당 득표에선 약 150만표(6.4%포인트)를 더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불과 1년2개월여 전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던 국민당은 왜 이번 선거에서 참패했을까? ‘중국 요인’과 홍콩 시위란 외부적 변수의 탓이 컸지만, 대만 내부적으로 보면 “세상이 달라진 걸 국민당만 몰랐다”는 지적도 가능해 보인다. 천광후이 대만 국립중정대 교수(정치학)는 선거를 이틀 앞둔 지난 9일 대만 외교국제문제연구소(IDIA) 주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구학적으로 해마다 1.5% 정도의 새로운 유권자층이 만들어진다. 4년이면 전체 유권자의 6%가량이 새로운 세대로 채워진다는 뜻이다. 대만의 젊은 세대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성장했다. 인권·생태·환경 등의 문제에 민감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도 높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열망하는 유권자 앞에서 국민당은 오로지 ‘경제성장’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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