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6 18:59
수정 : 2020.01.08 13:40
박주희 ㅣ ‘반갑다 친구야!’ 사무국장
시민들이 직접 새 시청 터를 정했다. 지난달 22일 시민참여단 250명이 현장답사와 토론을 거쳐 대구시 새 청사 후보지 4곳 가운데 옛 두류정수장을 새 자리로 결정했다. 이로써 15년 동안 결론을 내지 못하던 해묵은 과제를 시민 스스로 풀었다. 지역에서는 숙의민주주의 방식으로 현안을 해결한 첫 사례가 됐다.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시민들이 직접 토론을 거쳐 새 시청 터를 결정하는 방식이 순조롭게 결론을 낼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지켜봤다. 지지부진하던 새 청사 건립은 시장 공약으로 추진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신청사건립추진공론화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고 모든 과정에 시민들의 직접참여를 보장하기로 했다. 6월 시민의견 기초조사를 하고 다음달 시민원탁회의를 거쳐 시민설명회를 열었다. 이 과정에서 건립 기본구상과 예정지 평가기준 등을 확정했다. 최종결론은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택했다. 구색 맞추기로 시민이 의견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이 직접 결정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이 방식을 두고 여러 가지 우려가 있었다. 시민참여단의 대표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특정 후보지에 유리한 정보가 일방적으로 유통되지는 않을지 등 공정성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결론이 나더라도 탈락한 구·군이 승복하지 않고 또 다른 갈등의 불씨를 남기지 않을까 하는 점도 숙제로 안고 있었다.
시민참여단은 250만 시민 가운데 무작위 표본추출 방식으로 250명을 뽑아 구성했다. 지역·성별·연령을 충족시키는 과정을 거쳐 공정성을 확보했다는 것이 공론화위의 설명이다. 시민참여단이 2박3일 동안 합숙을 하면서 각 후보지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토론을 거쳐 최종 점수를 냈다. 공론화위는 모든 과정을 공개하고 평가자료를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투명성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언론에 소개된 시민참여단의 소감을 보면 대체로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시민들은 직접 시청 터를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토론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고 밝혔다. 직접 참여한 이들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지켜보거나 전해 들은 시민들도 행정단위에서 결정한 사항을 일방으로 전달받던 처지에서 비로소 자신이나 지척의 일처럼 더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충분했다.
과정에 대한 신뢰는 결과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고, 깨끗한 승복이 뒤따랐다. 사활을 건 유치전을 펼치다 결국 탈락했지만, 경쟁하던 3곳의 구·군 모두 결과를 받아들였다. 토론을 통해 최종 의견이 바뀌든 그렇지 않든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숙지하고 충분한 토론을 거친 결론과 그 과정이 생략된 결론은 사뭇 다르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대구는 이번 과정을 통해 한층 성숙한 민주주의를 맛보았다.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토론을 거쳐 합리적 결론을 끌어내고, 수긍하는 과정을 학습했다. 승패를 떠나 함께 만든 결과가 정책으로 결실을 보는 성공 경험을 나눴다. 이 경험이 앞으로 지역의 여러 현안을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데 디딤돌이 되리라 기대한다. 서울시와 경기도에서도 ‘지속가능한 민주주의’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숙의민주주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시민의 정책참여를 넓히려는 움직임이 지속되어왔다. 지역마다 행정의 영역에 갇힌 의사결정 구조를 깨고 시민들의 직접참여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시민의 직접참여가 어려운 민주적 절차의 단점은 일부 보완되지만 숙의민주주의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사 재개 결정은 숙의민주주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 현안을 풀어나간 첫 사례로 기록됐으나 당시 제기된 단점들은 여전히 과제로 남았다. 정치와 행정이 책임져야 할 난제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제까지 시민에게 떠넘길 수 있다는 우려와 엄밀한 공정성 확보 방안, 시간적 한계로 진정한 숙의가 어렵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번 대구의 숙의민주주의 과정을 톺아보는 절차가 꼭 필요해 보인다. 면밀하게 복기하면서 빼고 보태야 할 점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돌아봐야 한다. 이 또한 시민 스스로 해야 할 몫이다. 그래야 이 성공 경험이 우리 토양에 맞는 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진정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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