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03 19:44
수정 : 2005.02.03 19:44
폴란드 출신의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가 쓴 소설 〈어둠의 속〉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어느 제국주의자의 인간적 파멸을 그리고 있다. 쿠르츠라는 이 유럽인은 문명개화의 사명을 띠고 ‘극심한 어둠에 싸인’ 아프리카 중심부(콩고)로 떠났다가 타락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죽는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현지인들 위에 초법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다이아몬드 채취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끊임없는 무장경계 상태에 놓였었다. 신처럼 대접받는가 하면 순간순간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 같은 분열적 상태 속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황폐해갔고 이는 신체까지 좀먹었다. 쿠르츠는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끔찍해, 끔찍해”라는 말을 남기고 숨지고 만다.
당시 제국주의자들이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였으며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은 “백인들의 의무”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로 나섰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런 수사를 진정으로 확신하는 제국주의자들도 있었다. 쿠르츠도 자기 딴에는 고귀한 사명감에 넘치는 인물이어서, ‘아프리카에서 무한한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활동 계획서를 ‘야만적 악습 억제 협회’에 제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른 관습과 문화를 가진 인간들을 비인간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했던 결과는 자기파괴였다. 이라크 전쟁에 말려들어 비인간화한 미국의 포로고문 병사들을 생각하면 족할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한 정치인의 눈 주변 부분만을 찍은 사진을 보고 럼스펠드인가 했는데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공격을 명하는 샤론 이스라엘 총리였다. 독선에 사로잡혀 손에 피를 묻히는 가해자들의 심성은 이토록 비슷한 표정을 만들어내는구나 감탄스러웠다.
재선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취임사를 두고 말들이 많다. 이라크 전쟁 후 온 세계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목을 매게 된 것은 어이없긴 하지만 현실인데, 그가 부르짖은 것은 미국의 자유와 이를 전세계에 전파할 미국의 사명이었다. 이라크전 개전 명분으로 그가 그토록 강조한 것이 자유와 인권이었음을 기억하고, 라이스 국무장관이 이른 바 ‘폭정의 전초기지’로 여섯 나라를 지목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주시하고 있는 세계인들이 이 연설문을 듣고 다시 불길한 긴장감에 싸이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한 세기 전 제국주의자들의 문명/야만의 이분법적 수사가 자유/비자유의 이분법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21세기형 제국주의자가 탄생하는 순간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떤 논자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고 압박정책을 썼기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면서 부시의 ‘악의 축’론, 라이스의 ‘폭정의 전초기지’론을 옹호한다. 상기해야 할 것은 레이건은 강경 보수주의자였고 군비확장에 주력하긴 했으나 소련을 침공하여 유혈사태를 일으킨 적이 없고 고르바초프의 긴장완화 정책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악의 제국론은 외교정책이었지 전쟁정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화정책이 무력대결 정책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소련 체제변화에 기여하였다. 이라크에서 아수라장을 만든 것이 무안한 듯, 라이스 국무장관이 북한과 대화정책을 펴겠다고 했다니 두고 볼 일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부시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두고 반미라고 부르며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을 두고 친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촘스키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우리 이름으로는 안 돼’라는 반부시 광고를 내고 동참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부시가 결코 미국인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친미적인 사람들이야말로 미국인들이 타인 위에 군림하면서 공격받을까 히스테리컬한 두려움에 떠는 쿠르츠가 되기보다는 세계인의 진정한 벗이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부시의 자신만만해 보이는 얼굴이 더 이상의 유혈로 망가지지 않기를 빈다. 세계인들도 이를 위해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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