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2.11 16:38
수정 : 2005.02.11 16:38
백여 년 전 외국인들의 한국 여행기나 그들이 찍었던 사진을 즐겨보는 나는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그 시절 남대문 부근 사진을 차와 오염으로 찌든 현재의 남대문로의 모습과 교차시켜 본다. 그리고 가끔씩 서울의 궁궐과 성곽, 사대문과 그 안에 고즈넉이 자리한 전통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는 서울을 그려보기도 한다. 아마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경희궁의 기반석이 헐려 일본 부자 집 정원의 장식품이 되는 굴욕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조상의 영혼과 숨결이 숨쉬는 성곽, 가옥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식민지, 전쟁을 겪지 않았다면 서울은 프랑스 파리처럼 구시가지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되 외곽에 신시가지를 건설하여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서울이 그렇게 보존되어 있다면 오늘의 젊은이들은 파리의 젊은이들이 발자크와 빅토르 위고가 차를 마셨던 센 강변의 그 찻집에서 여전히 차를 마시듯이, 박지원과 김옥균이 젊음을 발산했던 북촌의 어느 주막에서 전통과 역사의 향기를 느끼면서 술을 마실 수 있었을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서울이 그런 모습을 갖고 있다면 서울을 찾는 외국 관광객 수는 적어도 지금의 두세 배는 넘을 것이고, 영국 프랑스처럼 우리도 조상 팔아서 수입을 두둑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을 떠 보면 아무런 개념, 방향도 없이 마구잡이로 개발된 서울의 처참한 모습만이 우리를 슬프게 할 따름이다.
망가진 서울, 망가진 역사를 지금 복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정말 소중한 유산과 자연이 돈 몇 푼에 팔려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일제가 들어와서 우리가 문명개화되었고, 박정희가 우리를 잘살게 해 주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개발지상주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주류 담론으로 자리잡아 온 국토를 골프장으로 만들어 수익을 올리고 일자리를 창출하자고 외치고 있다. 문화유산을 잘 지키고 자연을 보존하면 물질과 정신이 모두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사람들이 문화유산과 자연을 그토록 잘 지키려는 것은 그것이 단지 후세대들에게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며, 순수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그것이 장차 훨씬 이익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원칙한 파괴와 개발주의, 그것은 단지 군사독재의 구호가 아니라 식민지의 유산이다. 비탄, 좌절, 분노에 사로잡힌 식민지 백성들을 달래고 그 상층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미래와 지속 가능성보다는 그들에게 떡을 주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주의, 군사독재와 같은 정당성 없는 권력은 ‘새것’에만 집착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온갖 부패와 편법을 낳았고, 국민들을 돈독이 오른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지은 지 삼십년도 안 된 아파트를 재개발하여 재산가치 높이자는 우리사회의 열병은 몇 사람의 부자를 위해 온 국민과 후손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대표적 사례다.
일각에서는 새만금, 천성산 등지의 공사중단으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고 큰 불만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 일로 관련 기업과 노무자들이 당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생각하면 답답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다. 그 개발이 소수의 집단 이해를 물리치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공익적 관점에서 진행되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구잡이 개발의 수혜자들인 식민지, 군사독재의 부역세력은 ‘그까짓 돌 하나’, ‘그까짓 쓸모없는 묵은 책들’ 외치면서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고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웠지만 이제 우리 국민들도 무차별적인 개발은 결국 자신과 후손의 지속가능한 삶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되었다.
김동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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