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이상 근로능력 있는지
의사에게 진단하라는 복지부
무리한 정책에 의사 들러리 세우나 영화 〈워낭소리〉를 보았다. 주인공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있다. 영화 내내 다섯 평 남짓한 논과 늙은 소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깨달음이 전해졌다. 영화 중간에 할아버지가 열심히 벼를 베는 장면이 나온다. 기계로 베면 훨씬 수월할 것을 논바닥을 기어 다니며 낫으로 벼를 베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온몸으로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를 돕는 늙은 소와 할머니가 있다. 몇몇 누리꾼이 영화를 보고 할아버지의 자식들을 욕하는 댓글을 달았다. 그토록 안쓰럽게 일하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그냥 보고 있을 수 있냐는 거다. 나는 그 댓글에 또 댓글을 달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더 효도가 아닌가 싶었다. 3~4년도 넘게 만성 폐쇄성 기관지염으로 나에게 진료를 받는 할아버지가 있다. 나이는 여든이 다 돼 간다. 배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는 4~5월 환절기가 되면 숨찬 증상과 기침가래가 심해진다. 심한 증상으로 인해 대학병원 외래도 몇 달 다녔고 입원도 몇 차례나 했다. 1년 전 증상이 심해져 입원하라는 내 권유에 할아버지는 배 농사 때문에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농사는 자식들에게 맡기고 일단 입원을 하세요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셨다. 집에 전화를 해보니 할머니고 자식들이고 꼭 입원시켜 달라고 한다. 그런 할아버지와 한번은 탁 터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할아버지, 치료 열심히 안 받으시면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할아버지는 “죽는 게 대순가. 나는 죽는 날까지 농사지을 거야. 내가 없으면 집안일도, 농사일도 안 돼” 하고 말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가능한 한 헤아려 치료 방식을 결정한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 마당에 못할 이야기가 없으니,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내가 이렇게 길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 것은 요새 의사들이 의료급여 1종 환자들에게 써야 하는 어떤 진단서 때문에 그렇다. 의료급여 1종 환자들은 건강보험으로 인정된 진료내역은 비용을 내지 않는 분들이다. 가난한 분들이나 국가에 공이 있는 분들 중에 나라에서 돌봐야 한다고 정한 분들이다. 가정의학과 의사인 나의 진료실에는 주로 고혈압, 당뇨, 천식 등 만성질병으로 치료를 받는 분들이 처방전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많다. 이분들이 올해 4월부터는 의사에게서 진단서를 발급받아야 이전처럼 (보험 적용이 되는 부분이라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무슨 진단서냐면 3개월 이상 근로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재한 진단서다. 의사에게 3개월 이상의 근로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정받아 오라 하는 보건복지부 지침이 과연 올바른 법인지 몇날 며칠을 생각해 보았다. 만성 기관지염 할아버지처럼 의사가 근로능력이 없다고 해도 일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의사가 근로능력이 있다고 해도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와 상의하여 일을 하는 방향으로 혹은 일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번 진단서를 환자와 상의하여 판정을 해야 한다면, 다들 일을 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써 달라 할 것이다. 왜냐면 진단서가 있으면 의료비도 공짜고 지금까지 나오던 기초생활비도 탈 수 있으니까. 돈 때문에 환자들이 욕심을 낸다고 욕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분들에겐 이 돈이 정말 절실하다. 그래서 지금껏 나라에서 돌보는 의료급여 1종이었던 것이다. 의사가 의학적인 소견만으로 판정을 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로능력은 의학적인 진단만으로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복지부는 의료급여 1종 인원수를 줄이려고 의사의 진단을 내세워 의료급여 1종 환자를 2종 환자로 바꾸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 동네에 있는 의사들은 아마도 나처럼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이 지침을 만든 복지부에 따지고 싶을 것이다. 의사가 하는 일이 도대체 뭔지는 알고 이 지침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김미정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인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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