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3.08 17:35 수정 : 2009.03.09 16:44

왜냐면

문제풀이 달달 힌트 슬쩍
반평균 99.9점 올리기 다반사
감독교사 학교별 대이동 진풍경
서로 못미더워 운동장서 치르기도

필자는 5년 전 정년퇴임한 초등학교 교장이다. 본인의 교사시절은 7, 80년대 일제고사의 소용돌이 시대였다. 교장실에는 학급별 월별 성적 막대그래프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학급 평균 성적 99.9점이 나오는 판이었다. 1등 반에는 나름대로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반 표찰에 노랑별이 그려진 페넌트가 한 달 내내 나부꼈다. 심지어는 학생의 책상 모퉁이에도 노랑별 페넌트가 꽂혀 있었다. 일제고사를 치른 뒤 번개같이 채점이 시작되는데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의 채점 속도는 가히 기계적이었다. 4시간 시험을 치르고 4교시 시험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채점도 끝났다. 어느 학년 누가 전 과목 100점이라네 하는 소문은 금방 학교로부터 퍼져나가고 학부모에게도 알려졌으며 조금 있는 집 학부모는 전 교사를 초대하는 일도 상례였다. 없는 집 아이들은 부모의 초대를 염려해서 스스로 몇 개 틀린 답을 썼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담임이 ‘성적왕’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매월 월말의 일제고사는 학교 행사에 잡혀 있는 게 당연하고 교사와 학생들에게 월말고사는 의무적이었다.

학교행정의 모든 걸 수치로 나타내던 때였다. 예컨대, 학교 교육계획에 ‘애국심 고양’이라는 정책항목을 수치로 나타내기 위해 ‘태극기 그리기 전교생 몇 회, 무궁화나무 심기 4학년 이상 가정 몇 그루, 애국가 외어 부르기 3학년 이상 몇 명’ 등 모든 교육성과를 수치로 나타냈다. 그래서 목표치의 200%, 500%가 횡행하던 시대였다.

늘 꼴찌를 하는 후배가 선배의 조언을 얻겠다고 상담을 했다. 비법을 알려주라는 거였는데 그건 동료들 사이에서도 절대 비밀이었다. 딱한 호소였기에 한마디로 가르쳐주었다. ‘한 달 가르칠 교과내용을 3주 만에 끝내고 남은 1주에는 문제지를 서너 권 구입해서 몇 번이고 반복 연습해라.’

이런 판이라 더러는 아예 교과서를 내팽개치고 한 달 내내 문제지만 들이대는 교사들도 나타났다. 시골에서는 학생들이 문제지를 살 여유가 없어서 일제히 구입하지 못하므로 담임은 하루 종일 칠판에 문제를 빽빽이 쓰고 학생들은 이를 받아적느라고 날이 샜다. 일제고사를 치르다 보니 부정 문제가 불거졌다. 담임이 자기 반 시험감독을 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같은 학년의 학생을 서로 섞었다.

그런데 학급 학생을 쪼개 반 편성을 해서 시험을 치르자 담임이 감독을 하는 반에 편성된 학생들과 묵계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좀 어렵다 싶은 문제가 있어 학생이 ‘선생님 3번 문제 좀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물으면 담임은 ‘3번 문제의 2번은 …’ 이렇게 암시를 해서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 부진한 학생을 결석시키는 일은 관례였다. 그래야 전 과목 반 평균이 99.9가 나올 수 있었다.

군교육청 일제평가는 더 볼만했다. 학교 자체적으로 치르게 하여 보고를 받으면 모두가 성적을 조작했으므로 신뢰성이 없었다. 그래서 시험감독을 학교 단위로 맞바꾸었다. 일제고사 날은 교사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다른 학교로 가야 하는데 그때는 학교버스는 물론이고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새벽밥을 먹고 시외버스로 군 전체 교사들이 대이동을 했다. 같은 학년 반 학생들을 서로 나누어 반 편성을 해서 치르는 것도 못 믿어서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시험을 치기도 했다. 더러는 책상을 꺼내놓고 더러는 그냥 맨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바람에 날리는 시험지를 돌멩이로 누르고 시험을 쳤다. 미술화판으로 깔고 맨땅바닥에 엎드려서, 찬 바람에 코를 줄줄 흘리며 먼지가 부옇게 쌓인 시험지에 괴발개발 답안을 작성했다.

굳이 일제고사를 강요하는 교과부가 잃어버린 40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일제고사의 신뢰성을 위해 다시 시도해볼 만한 방안(?)이다.

이천만 광주 동구 산수동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