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속에 살아 시대를 증언한다
그것은 치욕의 역사이기도
영광의 역사이기도 하다
건축사적으로 바라봐도
동양적으로 재해석된 르네상스 건축
문화적 존재만으로 가치는 차고 넘친다 서울시청 철거와 관련된 최근 논란을 보면서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에 철거되었던 국립중앙박물관, 곧 옛 조선총독부가 떠오른다.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로 상징되었던 그것은 공청회 한 번 없이 그렇게 철거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포클레인으로 서울시청 건물 한쪽 귀퉁이가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치욕의 상징이라고 부르는 건축물들을 우리는 근대건축이라고 부른다. 근대건축은 조선 말 개항을 기점으로 일제시대를 거치고 6·25 전쟁을 지나는 시기에 축조된 건축물을 통칭해 분류하는 건축사조다. 그리고 1960년대를 거치면서 산업화와 성장에 의한 개발정책과 일제 청산이라는 이념적 이유로 힘없이 허물어지고 사라졌다. 다만 이런 개발에서 소외되어 낙후된 몇몇 지역에는 아직 남아있지만 이것들마저도 개발이라는 경제논리로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것은 일제 잔재라는 이유만으로도 개발 정당성에 힘을 실어줘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의 굴욕은 잊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 그 자체다. 하지만 그것도 우리 역사의 일부임을 어찌하겠는가. 어떤 민족이건 역사는 굴곡을 겪는다. 침탈 역사를 가진 민족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다. 물론 나의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지만 과거 상처에 집착해 자칫 피해망상 같은 모습으로 현재가 비추어지는 것은 우리에게 이득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러한 역사의 시나리오를 선용하느냐다. 기억하기 싫은 것은 다 사라지게 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겨두게 된다면 그것 또한 우리의 후손에게 역사를 연결해주는 옳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만 기록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속에 살아서 평가되기도 한다. 유대인 대학살의 장소 아우슈비츠는 지금도 그들의 자손에게 생생한 그들의 비통한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일본 히로시마의 원폭 잔해들은 지금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가? 그리고 미국의 자존심을 일시에 무너뜨린 9·11 참사의 흔적은 어떠한가? 근대건축은 일제 침탈의 방편으로 축조된 치욕적 역사가 스며 있어서 반감의 대상이 되지만,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진화된 하나의 건축표본이기도 하다. 서울시청사는 동양에서 흡수한 르네상스 건축의 변형모델이다. 건축 형태는 지리·환경적 차이 따라 똑같은 양식이라 할지라도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서울시청은 동양적 관점으로 재해석된 독특한 양식의 르네상스 건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냥 부숴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존재다. 모든 문화적 존재는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 그 존재 가치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치욕의 역사는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대와 세상이 변했다. 그러한 침탈과 수치의 현장을 신세대적 발상에 의한 예술적 활동으로도 얼마든지 건물이 담은 의미를 반박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시청사를 무궁화꽃으로 뒤덮어서 태극기 문양으로 수놓았던 퍼포먼스 예술에서 코끝이 찡해지는 소리 없는 역사의 여운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양하게 기억하고 미래에 전달될 수 있도록 소중히 간직해 가지고 가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감정적으로만 대처하다가 이득을 본 것이 있을까? 지금의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또 어떠한가?
한명식 대구한의대 실내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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