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희망의 새해를 위하여 |
오는 해가 가는 해의 끝자락에 있듯이 희망은 절망의 끝자락에 있다. 올해에는 진정한 개혁으로 진일보하기 위해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선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줄탁동시’의 과정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쓰는 표현처럼 다사다난했던 2004년 갑신년이 저물어 간다. 늘 그렇듯 시간은 돌고 도는 순환의 물리적 현상인지 연속적인 것인지 헤아릴 새도 없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보낸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남게 마련이지만 올해 세모의 끝자락에 다소 생소한 사자성어가 우리들 앞에 다가섰다. 자주 인용하기도 식상한 느낌을 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회자되고 있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가 그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와 당파가 다른 집단을 무조건 공격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탄핵정국, 수도이전 논란, 이른바 4대 개혁입법 등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이 이를 주도했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터다. 여기에 더해 집단적 최면처럼 상대방을 무조건 배척하는 사회상을 꼬집은 그 적절한 지적에 통렬함과 함께 아픔마저 배어 난다. 한편, 2001년부터 <교수신문>이 선정했던 ‘올해의 사자성어’가 ‘오리무중’, ‘이합집산’, ‘우왕좌왕’이었다니 그 일맥상통함에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는 느낌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세인들의 평가 역시 ‘이전투구’, ‘지리멸렬’, ‘진퇴양난’, ‘이판사판’ 등 오십보백보, 초록동색의 동류 동종의 표현들이다.
이라크 파병의 충격은 ‘얼치기 개혁’의 정체성과 한계를 드러내주기에 충분했다. 오늘 더러운 침략전쟁에 동참하는 ‘합법적’ 야만성은 일제 강점기의 잘못된 과거 청산을 부르짖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비정규직 800만명 시대를 넘어 사회 양극화 현상이 극에 달해 가는데도 동북아경제중심국가 건설은 누구를 향한 장밋빛 구호인가? 절망하는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빛줄기 한 점 보낼 수 없는 ‘민생정치’는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직도 이 땅에서는 ‘개혁’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정당성을 확인받을 수 있는 시절이건만, 머지않아 우리는 그 얼치기 ‘개혁’마저 단죄해야 하는가?
필자가 몸 담은 교육사회 역시 희망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을 머릿속에 각인시킨 한 해였다. 사교육비 경감과 공교육 정상화는 고지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늘 표상되었지만, 결국 고교등급제 파동, 수능부정 사태, 사립학교법 개정 공방으로 한 해를 보내고 말았다. 학벌사회 타파를 정점으로 대학서열화 완화, 지역간·계층간 교육격차 완화, 교육소외 지역과 계층의 교육복지 강화 등 산적한 교육과제는 무력하게 실종되고, 경쟁과 효율을 앞세운 공고한 사회적 기제는 교육을 사적 경쟁의 약육강식, 왜곡된 노동시장이 이동된 공간에 지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오는 해가 가는 해의 끝자락에 있듯이 희망은 절망의 끝자락에 있을 터이다. 2005년 을유년의 말, 올해의 사자성어는 이 말이 어떨까 싶다. 연대성과 공존의 의미를 강조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적절함에도 필자는 이 말에 힘을 주고 싶다. ‘줄탁동시’(口卒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개혁으로 진일보하고 희망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당동벌이’가 아닌 ‘줄탁동시’의 과정으로 거듭나야 함을 닭띠 해를 빌려 소망해 보는 것이다.
최명주/순천여고 교사, 전교조 전남지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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