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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8 13:49 수정 : 2005.11.28 14:05

최근 고이즈미 일본 수상은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한층 강화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의도적으로 불화를 조장하는 외교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이면에는 국내외 정치의 복잡한 계산이 깔려 있겠지만, 경제회복에 대한 확신이나 자신감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일본경제는 일본 국왕의 연호를 딴 ‘헤이세이 불황’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5년의 장기불황 속에서 일본인들에게 각인된 좌절감과 불안감은 우리의 실감을 뛰어넘는 것으로, 수많은 소설들을 통해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자유인의 개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무라카미 류의 <엑소더스>가 눈에 띈다. 그는 어느 중학생의 목소리를 빌려 위기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일본사회 그리고 그 토대로서의 일본경제를 다음과 같이 야유한다. “이 나라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정말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란 1990년대는 거품경제에 대한 반성이 있었고, 모두 자신감을 잃었을 뿐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우유부단한 어른들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엑소더스, 양억관 옮김, 웅진닷컴, 2001)

이렇게 야유를 받았던 시스템이 오랜 불황 속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결국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진단이 속속 제출되고 있다. 또한 영원히 되살아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그 기업들도, 대기업을 중심으로 높은 실적을 통해 수익기반의 확실한 확보를 입증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류는 새롭게 변화한 시스템 속에서는 ‘희망’을 찾아내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엄청난 차별이 가해지는 가운데 조직과 회사를 위해서라면 반사회적 행동을 주저하지 않던 회사중심의 불공정한 사회는 이제 와해되었지만, 새롭게 출현한 시스템 또한 자본도 개인도 생존을 건 필사의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가운데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로 양극화된 사회라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설 자리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높은 생산성과 경쟁력이 발휘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 과정으로부터 배제된 다수가 존재하는 ‘분열사회’는 결코 건강하고 창조적인 경쟁사회가 아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이러한 ‘분열사회’로의 경향에 맞서 두 가지 대응이 모색 중이다. 하나는 작은 정부․강한 국가에 의한 헌법개정을 통해 국민의 권리와 의무관계를 총체적으로 재점검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분열사회를 대미종속 관계로부터의 탈출 및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전향적으로 극복하려는 새로운 운동도 강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양극화된 경제시스템이 일본보다도 앞서 이미 작동 중인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초우량 글로벌기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의 열매가 국민경제의 나머지 영역으로 흘러가지 않는 가운데 양질의 일자리는 구조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되도록 경쟁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보다는 세계화와 탈산업화라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 세계화에 어디까지 적응하고 어디부터 거리를 둘 것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생활세계의 확실한 기반을 어떠한 형태로 구축할 것이며, 이를 위해 어떠한 경제적 조건을 정비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소중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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