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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1 10:06 수정 : 2020.01.11 10:14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아이젠휘텐슈타트에는 2만6천여명이 산다. 이곳에는 난민이 처음 도착해 임시 거주하는 난민등록소가 있다. 아이젠휘텐슈타트 기차역 모습. 국제여성공간(IWS) 제공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13. 자전거와 여성의 자유

베를린과 떨어진 난민숙소는
기차 타고 걸어서 몇시간 가야
외부인 방문도 제한해 ‘고립’

여성 활동가, 난민숙소 찾아가
법률상담·독일어 강의 소개
자전거 2인1조 무료 수업도
“과거에 몰랐던 해방감 느껴”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아이젠휘텐슈타트에는 2만6천여명이 산다. 이곳에는 난민이 처음 도착해 임시 거주하는 난민등록소가 있다. 아이젠휘텐슈타트 기차역 모습. 국제여성공간(IWS) 제공

케냐에서 온 루시는 지난해 11월부터 ‘국제여성공간’(IWS)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다. 그는 혼자 지난해 7월 독일에 도착했다. 현재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의 도시 아이젠휘텐슈타트의 난민 임시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이곳은 난민이 최초로 망명을 신청하는 ‘특정접수센터’다. 체류 허가가 나면 다른 주정부 관련 기관으로 옮기게 되고, 거부당하면 바로 강제추방 당한다. 현재 독일에는 약 40개의 특정접수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루시가 지내는 센터에는 약 500명의 난민이 지내고 있으며, 건물은 7개로 나뉘어 있다. 심각한 병이 있는 환자들은 컨테이너에 격리돼 있다. 이곳은 베를린에서 120㎞쯤 떨어져 있어 베를린 시내로 나오려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기차를 놓치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기차역에 내려서 숙소로 가려면 다시 버스를 20분 넘게 타야 하고,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루시와 같은 센터에서 지내는 난민 여성 엘리는 지난 11월 베를린에서 법률상담을 받고 아이젠휘텐슈타트 기차역에 도착했지만 이미 버스 운행이 끝난 뒤였다. 달리 방법이 없던 엘리는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한 시간 가까이 추위에 떨며 혼자 걸어야 했다. 베를린 같은 대도시에서도 대부분 가게가 문을 닫는 저녁 7시 이후부터는 거리에 불빛이 없어지고 그나마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마저 어두워 무서운데, 숲속 길을 늦은 밤 혼자 걸으며 그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은 짐작하기 어렵다.

난민을 고립시키는 ‘라거’

다른 도시인 뷘스도르프의 특정접수센터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곳은 베를린에서 약 54㎞ 떨어져 있어 기차로는 한 시간 정도 걸리지만, 뷘스도르프 기차역에서 센터까지 운행하는 대중교통은 전혀 없다. 이곳에서 지내는 여성들은 매일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4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특정접수센터를 비롯해 천막촌, 컨테이너, 공공기관 건물 등 난민이 지내는 숙소를 ‘라거’(Lager)라고 하는데, 라거는 이처럼 난민을 고립시킨다. 외부인의 방문은 거주자가 초대해야만 가능하며, 방문자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와 소지품을 철저히 검사하고 통제한다. 라거별로 정해진 시간에만 방문이 가능하며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제한한다. 취사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는 지급되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감옥이나 다름없다.

국제여성공간 내에 난민 여성으로만 구성된 ‘난민 여성 자조 모임’은 라거로 인한 고립을 깨기 위해 지난해 여름부터 ‘라거 방문 투어’를 진행 중이다. 독일에 막 도착한 난민 여성은 새로운 생활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법률·건강 등 필요한 상담을 받을 기회가 없다. 연방정부와 주정부별로 다양한 난민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정작 정보는 당사자인 난민에게 닿지 않는다. 라거는 지원 기관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명확한 이유 없이 난민 신청을 거부당하거나 강제송환 위험에 놓인 여성들은 아무런 법적 지원 없이 라거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지난 11월 난민 여성 자조 모임 활동가들이 아이젠휘텐슈타트 난민임시숙소를 방문해 둘러보고 있다. 이곳 난민임시숙소는 베를린에서 약 120㎞ 떨어져 있어 베를린 시내로 나오려면 약 2시간이 걸린다. 국제여성공간(IWS) 제공

난민 여성 자조 모임은 이미 긴 시간 고립된 상황을 겪은 뒤 베를린 시내에 숙소와 일자리를 구해 정착한 난민 여성 활동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라거에서 지내는 여성이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라거 방문 투어를 통해 이들은 주정부와 관련 기관에서 제공한 자료를 수집해 배포하고, 다양한 상담을 제공한다. 국제여성공간에서 주기적으로 운영하는 무료 법률상담과 독일어 수업 일정에 대해서도 알린다.

루시 역시 난민 여성 자조 모임이 지난 11월 아이젠휘텐슈타트를 방문했을 때 국제여성공간을 알게 되었고, 바로 조직 활동에 합류했다. 당시 국제여성공간 동료들은 가나와 나이지리아, 팔레스타인 등에서 온 20여명의 여성을 만났다. 대부분 독일에 도착한 지 2주에서 3개월 정도 된 여성들이었다. 라거 투어를 진행하는 동료들은 “만약 우리가 변호사에게 무료로 법률상담을 받거나 독일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걸 알았다면, 몇 년째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그저 전전긍긍하며 지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제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난민 여성을 돕고자 한다”고 말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난민 여성들

베를린 여성 활동가들은 난민 여성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전거 수업’도 열고 있다. 자전거가 있으면 제한된 이동의 자유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 서비스가 없는 곳에서 자전거로 이동할 수 있고, 외출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감옥 같은 라거를 잠시나마 벗어나 자전거를 탈 수 있다.

문제는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온 여성들은 고향에서 자전거를 배울 기회가 없어 대부분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영리단체 ‘바이키지스’(BIKEYGEES e.V.)는 2015년부터 베를린 시내 중심의 자전거 훈련장에서 매주 이주·난민 여성과 소녀를 위한 자전거 수업을 무료로 열고 있다. 훈련장에 도착하면 직원들이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러 온 자원봉사자인지, 배우러 온 것인지 묻고 스티커에 이름을 적어 옷에 붙여준다. 아무도 출신, 종교, 지위 등을 묻지 않는다.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자원봉사자 2명과 배우려는 여성 1명이 2인1조가 되어 자전거를 탈 뿐이다.

지난해 봄, 베를린 시내 중심의 자전거 훈련장에서 여성들이 이주·난민 여성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배우는 모습. 채혜원 제공

수업은 훈련장에 있는 약 50대의 자전거로 하고, 안정적으로 타는 여성에게는 자전거를 기부한다. 이를 위해 바이키지스 그룹은 중고 자전거와 헬멧, 잠금장치와 수리장치 등을 시민에게 기부받고 있다. 2018년 가을에만 총 570명의 여성이 이곳에서 자전거를 배웠고, 150대의 자전거를 기부받았다. 훈련장에는 실제 도로와 같이 신호등, 교통표지판 따위가 설치되어 있어 독일 교통체계와 자전거 수리 방법도 배울 수 있다.

나 역시 2년 전 봄 이곳에서 독일 교통체계를 배웠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자주 탔지만 독일에 도착한 뒤 1년 넘게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모두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전거도로에서 일어난 사고를 여러 차례 봤고, 한국과 다른 독일 교통체계를 익혀 자전거를 타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다른 이주여성들과 함께 독일 교통체계를 배우고 간단한 수리 기술을 익히면서 용기를 얻어 비로소 자전거를 다시 탈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왕복 20㎞ 정도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바이키지스’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 출신 여성 로키야는 “여성에게 자전거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 나라와 달리, 독일에선 많은 여성들이 자유롭게 자전거를 타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그들을 보며 자전거를 배우고 싶었고, 이제는 자전거를 탈 때 과거에 몰랐던 해방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오래전부터 자전거는 페미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서 여성은 이동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코르셋으로 조여졌던 옷이 편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복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6년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수전 앤서니는 “이 세상에서 자전거만큼 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안장에 앉는 순간, 자전거는 여성을 자립과 독립 그리고 속박되지 않은 세계로 이끌어준다”고 말했다.

2020년 새해에는 더 많은 여성이 자전거를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이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자 한다. 여성은, 여성이 돕는다.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 이슈를 전한다. 격주 연재.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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