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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2 19:14 수정 : 2005.10.06 10:14

볼프강 티어제

[통일독일 15년] 통일 주역에게 듣는다 ① 볼프강 티어제

독일이 3일로 통일 15주년을 맞는다. 저명한 언론인으로 시사 주간지 <디차이트> 발행인을 지낸 테오 좀머는 지난해 장벽 붕괴 15년을 맞아 “통일은 아직 반(半)제품”이라고 평가했다. 15년이 지나도 좀처럼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는 문제들 때문이다. 그것은 제도나 체제의 문제보다 ‘마음의 분단’이다.

2005년 분단 60년을 지나 냉전의 긴 터널 끝에 있는 한반도의 젊은 학자들이 독일통일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현재도 주요 구실을 하는 인물들을 직접 만나 통일 15년 독일의 오늘을 묻고 들었다. 이 인터뷰는 중앙대학교 한독문화연구소 연구원 10명이 참여한 학술진흥재단 지원의 <통일 이후 동서독 사회문화 갈등 연구> (책임자: 김누리 중앙대 교수)라는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다. 연구자들은 독일의 일견 성공적인 정치·경제 체제통합에도 불구하고 사회·문화적 갈등이 심화되는 현실에 비춰 한반도 통일논의의 문화적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인터뷰는 베를린 자유대학 <동독문제연구소> 협조 아래 2005년 1월 5일에서 2월 3일까지 동서독 주요인사 20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이 가운데 3명을 뽑아 추가 이메일 등의 인터뷰로 최근의 독일 상황에 대한 내용을 보완했다. 연구자들은 방대한 분량의 녹취록을 정리해 <통일독일을 말한다>(가제)라는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1. 볼프강 티어제(동독 출신 정치인- 연방하원 의장)-이노은 서울대 강사(독일 킬대학 문학박사)
2. 에곤 바(서독 출신 정치인- 동방정책의 설계자)-배기정 한국외대 강사(독일 마르부르크대학 문학박사)
3. 폴커 브라운(저항 작가- 현대 독일의 대표 시인)-안성찬 서강대 강사(서강대 독문학박사)
4. 좌담:김누리(중앙대 독문과 교수)- 이노은- 배기정- 안성찬


이노은= 지난 9월 18일 총선 결과 옛동독 지역에서는 동독지역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사회당(PDS)과 서독 좌파가 결합한 좌파연합이 25% 가까이 득표해 기민련(CDU)을 제치고 사민당(SPD)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이 놀라운 결과를 어떻게 보는가?

티어제= 총선 결과를 놓고 정당과 정치인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정부를 안정적으로 구성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좌파연합이 동독지역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좌파연합은 동독지역에 넓은 정치적 기반과 고정적인 지지자들이 있는 유일한 당이다. 그들이 과거 45년 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노은=독일통일 10주년을 결산하는 자리에서 당신은 동독인들이 시작한 변혁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 통일 15주년을 맞아 당신은 독일통일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좌파연합 동독 약진 놀랄일 아니다

티어제=우리가 여전히 변혁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그동안 달라진 점이라면 서독인들이 자신들 또한 변화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10년 동안 동독인들은 학생이고 서독인들은 교사라는 식의 단순논리가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서독인들 또한 변화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동서독 사람들이 이 나라를 함께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초기에는 동독인들만이 변화를 일방적으로 강요받았지만, 이제는 동서독인들이 함께 변화해야 하는 변화의 제2단계에 들어섰다.

이노은=이제야 서독인들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티어제=서독인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동독이 망했다고 해서 서독의 어느 시골마을이 갑자기 변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 말은 통일 이전부터 서독도 변화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나는 통일 직후 구성된 국회에서 동독과 서독이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통찰력있는 정치가라면 독일통일 직후 동서독이 함께 개혁을 이루자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헬무트 콜 당시 총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장밋빛 환상을 조장하여 정치적 성공을 거뒀고,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노은=당신 말대로 통일 후 15년이 지난 지금 독일이 변화의 제2단계에 들어섰다면 이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티어제=동독인들은 통일 과정을 겪으면서 급격한 변화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들은 통일 이후의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그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지금 변화를 두려워하는 서독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 겪은 불평등한 상황으로 인해 빠져든 열등감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노은=통일 이후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동독의 스탈린주의 과거를 청산하는 문제였다. 과거청산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가?

티어제=나는 우리 독일인들이 비교적 철저하게 과거청산을 이루어냈다고 본다. 우리가 슈타지(옛동독의 비밀경찰) 문서를 개방한 것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원한 것은 누구보다도 동독인들 자신이었다. 통일독일에서 공직을 맡게 될 사람이 동독 시절에 스파이로 활동한 전력이 있는지 조사하고 검증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어야 한다. 어느 시기가 되면 결단을 내려서 정치적, 인간적, 윤리적인 면에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이제 그 시기가 되었다. 내년이 되면 슈타지 문서법의 시효가 만료된다. 그렇게 되면 과거 동독의 법적 규명 및 청산이라는 과제는 공식적으로 종결된다.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새로 규정이 마련될 것이다.

이제 동독의 역사는 독일의 집단적 기억의 일부로 남게 될 것이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의 독일 역사는 서독의 역사만이 아니라, 동서독 양국의 역사이며, 양국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탈린주의 과거청산 철저히 해내

이노은=통일 이후 독일은 동서독 주민간의 사회문화적 갈등과 심각한 실업 및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다. 국회의장으로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티어제=나는 1990년에 통일이 좀 더 서서히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기대와 약속이 컸기 때문에, 실망도 큰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현안은 실업률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변화된 조건에 적응하면서도 사회적 연대라는 대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체제가 개혁돼야 한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자로서 나의 신념이다. 세계화에 대응하는 유럽식 사회보장 모델을 성공시키고,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지켜내는 것이 현재 우리의 당면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성장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비하면 동서독 주민들간의 갈등은 부차적인 문제다. 동독인들 또한 독일의 미래에 함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노은=당신은 동독 시절 시민운동과 기독교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당신이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티어제=나는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고 변호사인 아버지가 동독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을 주로 변호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폐쇄적인 동독사회에 순응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기 위해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난 자신을 항상 좌파라고 생각해 왔고, 정치의 과제는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노은=통일 이후 동독 시민운동은 급격히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당신은 시민운동을 발판으로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하여 국회의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당신의 정치적인 성공에는 어떤 비결이 있는가?

티어제=동독 시민운동 내부에는 서로 다른 성향과 목표를 가진 단체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정권교체와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룬 후에 시민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투쟁의 시기에 요구되는 덕목과 민주주의 정당정치에서 요구되는 덕목이 달랐기 때문에 기민련의 앙겔라 메르켈 당수나 나의 경우처럼 통일 이전에 두드러진 활동을 벌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맡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동독인으로서 서독인들과 다른 식으로 말하고 생각할 줄 안다는 것도 정치인으로서 중요한 자산이 됐다.

이노은=한반도에서는 최근 6자회담이 타결되고, 개성공단을 통한 경제협력이 활발히 진행되는 등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한반도의 상황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티어제=남북간의 경제협력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남북 모두에게 실익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정치적인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유럽의 경험을 깊이 연구했기 때문에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가는 일,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 언젠가는 결실을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한도 이질감 극복 대비해야

대담 이노은 서울대 강사·독일 킬대학 문학박사
이노은=남북간의 문화적 이질감은 통일 이전 동서독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독일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티어제=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에 대한 열정을 갖되 환상에 빠지지 말고 냉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과정은 현실에 대한 이성적인 분석을 토대로 아주 천천히 진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북한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아야 한다. 통일은 아주 길고도 비싼 과정이라는 것, 남북한 주민들간의 상호 이해 과정은 정치경제적인 통합 과정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해야 한다. 북한주민들을 향해서는 생활수준이 금방 향상될 것처럼 공언하고, 남한주민들을 향해서는 큰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무책임한 정치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정리/이노은

볼프강 티어제는 누구?

1943년 동독의 브레스라우에서 태어난 티어제 의장은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학자였으나, 동독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9년 동독 시민운동인 노이에스포룸에 참가한 뒤 정치에 입문했다. 90년 옛동독 사민당 당수에 이어 동서독 통합 사민당 부총재로 당선됐고 이후 계속 연방 하원의원에 뽑힌 그는 옛동독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98년부터 연방하원 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베를린 디더호퍼가 7번지 2층에 있는 방 3개짜리 허름한 임대 아파트를 관저를 겸해 쓸 정도로 청빈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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