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30 18:21
수정 : 2019.05.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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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천안문 사건 당시 왕단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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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지도자 왕단 “공산당에 섣부른 희망”
08헌장 참여 장쭈화 “대국의 전환 긴 시간 필요”
인민해방군 소속 기자 “군 사령관들 진압에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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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천안문 사건 당시 왕단의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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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되게 중국 정부가 (시민에게) 발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중국 민주화운동인 ‘천안문(톈안먼) 사건’ 30돌을 맞아 사건 주역과 목격자들이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며 좌절의 30년을 토로하고 나섰다. 천안문 사건 당시 학생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던 왕단은 30일 일본 <지지통신> 인터뷰에서 중국공산당을 맹렬히 비난했다. 1989년 당시 베이징대 학생이었던 그는 사건 뒤 지명수배를 당했다. 2차례 투옥됐다가 1998년 석방됐으며, 지금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왕단은 인민해방군이 발포했을 때 “정말로 경악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1989년 4월부터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자 6월4일 새벽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진압했다. 그는 사망자가 중국 정부가 발표한 319명보다 많은 2000명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에는 “희망이 없다”고 단적으로 말했다. 29일 도쿄 외국특파원협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30년 전) 중국공산당에 희망을 품었었다. 섣부른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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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단의 2011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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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을 받은 고 류샤오보와 함께 공산당 독재를 비판한 ‘08헌장’ 작성에 참여한 헌법학자 장쭈화는 1980년대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지도부 일원이었다. 하지만 천안문 사건은 “도덕적 선을 넘었다”고 느끼고 체제 비판으로 돌아섰다. 베이징에서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 응한 장쭈화는 중국공산당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 견해를 내비쳤다. “30년 뒤 건국 100돌까지 존속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중국 민주화 전망에 대해서는 “전제주의적 전통을 지닌 대국의 전환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인민해방군 장교이자 소속 기자로 유혈 진압을 목격한 지앙 린(66)도 29일치 <뉴욕 타임스>에 30년간 가슴에 묻었던 충격과 슬픔, 진실을 털어놨다. 그는 인민해방군 사령관들이 중국 지도부의 유혈 진압 지시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지휘관 7명이 계엄령 선포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편지를 중앙에 전달했다고 했다. 그는 편지 내용을 보도하기 위해 <인민일보> 편집자에게 전화로 내용을 읽어줬으나 보도되지 않았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며 “인민해방군은 인민의 군대이니 베이징에 진군하거나 시민에게 발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인민해방군 장성이었던 아버지를 둔 그는 천안문 사건 몇년 뒤 회고록을 썼다가 체포당하기도 했으며 1996년 전역했다. 최근 중국을 떠난 그는 “고통이 30년 동안 나를 갉아먹었다”며 “당시 참여한 모두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야 한다. 그게 숨진 이들, 생존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의무”라고 말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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