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25 20:45
수정 : 2005.05.25 20:45
회담 전격취소로 고이즈미 타격한 ‘배짱’ 중국인들 칭송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회담을 불과 몇시간 앞두고 일방적으로 취소한 뒤 귀국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일격을 날린 우이 중국 부총리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중국 내에서는 “역시 철낭자(여걸)”라는 평판이 확산되고 있다. ‘국제 예의상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일본 쪽 비난과는 달리 중국인들 사이에는 ‘잘못된 역사를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평가 때문이다.
특히 우 부총리가 17일 일본에 도착한 뒤 고이즈미 총리가 바로 전날 “전몰자 추도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는 다른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을 듣고 스스로 회담 취소를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그의 배짱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중국 여성 중 최고위 공직자인 우 부총리는 이전부터 ‘철낭자’ ‘중국의 대처’로 불렸다. 특히, 1991년 당시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으로 중-미 최대 현안이던 지적재산권 협상을 맡았던 그는 미국 무역대표부(USTR) 칼라 힐스 대표가 중국 내 불법복제를 겨냥해 “우리는 좀도둑과 협상하러 왔다”고 독설을 내뱉자 “우리는 강도와 교섭하고 있다. 미국의 박물관을 둘러보라, 중국에서 약탈해간 유물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매섭게 되쏘아 붙였던 일화는 유명하다. 4년여 동안 이어진 이 협상에서 우이는 미국이 공표한 보복관세 발효 시한을 넘겨가며 협상을 진행하는 벼랑 끝 전술을 통해 중국의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38년 후베이성 우한에서 태어난 우 부총리는 맡은 일에 온몸을 던지는 의지와 노력, 당찬 면모로 유명하다. 베이징석유학원 석유정제학과를 졸업한 뒤 26년 동안 란저우와 베이징의 석유회사에서 일했으며, 정유공장에서 일할 때는 트랙터와 불도저 운전 기술을 익혀 직접 몰기도 했다. 88년 베이징 부시장으로 발탁돼 정계에 들어선 그는 89년 천안문 사태 여파로 중국 대외무역이 사면초가에 처한 상태에서 베이징 무역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해 돌파구를 열었다.
이런 추진력과 성과는 장쩌민, 주룽지 등 당시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98년 전인대에서 주룽지 전 총리의 지원을 받아 대외경제무역합작부장으로 선출된 그는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 유치를 지휘했다.
2000년에는 주 전 총리가 그를 차기 총리로 밀고 있다는 홍콩 언론의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2003년에는 ‘사스와의 전쟁’을 이끌었으며, 그해 11월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뒤 지난해 여성 최초로 중국 부총리가 됐다. 독신인 우 부총리의 성공은 쑨원의 부인 쑹칭링,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 등 유명한 남편을 둔 중국의 ‘1세대 여걸’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박민희 기자, 연합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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